2006년 2월 28일 오후 2시경 뉴욕의 JFK 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오자 한국에서 출발 전 전화로 부탁한 분께서 따님과 같이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 가족이 갑작스레 이민을 간다고 하자 아내의 먼 이모뻘 되는 분 친구가 뉴욕에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장모님께서 얻어 우리의 임시거처를 부탁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생활하면서 느끼게 됐지만 이분들만큼 우리 가족에게 정성으로 대해준 분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을 정도로 친절하게 잘 보살펴 주셨다.
2대의 택시에 3명씩 나눠 타고 미리 준비해둔 거처로 이동하였다. JFK공항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Flushing 이라고 하는 타운인데 주택이 위치한 곳은 비교적 한적한 곳이었다.
어느 한국인이 새집을 건축하여 팔려고 내논 집인데 아직 거래가 되지않고 있는 상태의 2층 건물로 우리가족이 임시로 생활할 곳은 방 3개, 거실 그리고 주방이 있는 2층이었다. 깨끗하고 창문이 많으며 넓은 집이었다. 커튼이나 블라인드등이 전혀 없어 생활에 다소 불편함이 있었지만 만족스러웠다.
짐꾸러미들을 대충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서 그 분의 안내에 따라 도시 관광을 시작했는데 이곳은 거의 한국과 다를 바 없었다.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에 비하면 몇십년 정도 뒤떨어진 듯 했지만 없는게 없었다.
알고보니 이곳은 미국 뉴욕으로 이민 오는 한국사람들의 메카와도 같은 도시였다. 백인보다는 흑인, 중국인, 히스패닉계통의 인종이 많이 살고 있었고 고등학교에 건총을 휴대한 경찰관이 서성대고 학교주변이 철망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흑인학생들의 고함소리에 두 딸아이가 바짝 긴장하기도 하였다. 사모님의 말씀에 따르면 한국사람들이 살아가기엔 아주 편하고 좋은 곳인데 교육여건은 좋지않은 곳이라고 하였다.
그럭저럭 하루를 보내고 해가 저물자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이들이 하늘을 쳐다보고는 함성을 질렀다. 2월의 차고 깨끗한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너무도 선명하게 반짝였다. 한국에선 지리산 계곡에서나 볼수 있는 광경이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순식간 우리는 정말로 아름다운 나라 미국으로 이민 잘 왔다고 생각했다.
새집이라 아직 난방시설이 없어서 우리는 한방에 서로 몸을 껴안고 누었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 장모님께서 화물편으로 보내지 말고 꼭 챙겨가라고 해서 가져온 1인용 옥매트를 전원에 끼웠지만 아뿔싸 여긴 120볼트 전원이어서 아무런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넷이 나란이 자리에 누었지만 잠은 오질 않고 창문으로 바라보는 수많은 별들이 여전히 아름다웠다.
다음날, 뉴욕에서 맞은 첫날아침! 특별히 할 일도 없었지만 아내는 일찍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하였다. 가장 기본적인 식기며 마른 반찬 몇가지가 전부였지만 신문지를 깔아 만든 부엌바닥에서 모두들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오전 9시쯤 사모님께서 오셔서 가장 먼저 준비해야 될 행정처리가 Social Security Number(한국의 주민등록 번호와 비슷한 제도)를 신청해야 된다고 해서 가까운 사무소에 가서 신고를 마쳤고 그 증명서를 받으려면 1주일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것 없이는 은행계좌 개설, 자동차 운전면허시험 신청 등 아무런 행정절차를 이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증명서를 수령할 때까지는 뉴욕관광이나 즐기자며 매일같이 맨해튼에 나가서 앰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자유의 여신상, 42번가 거리, 타임스퀘어 등 유명관광지를 돌아다니며 미국의 생활을 배우고자 애썼다.
나의 얄팍한 영어실력에도 아내와 아이들은 영어가 아주 능통한 사람인양 의지하고 있었지만 간단한 커피 한잔, 햄버거 하나 살 때도 신통찮은 영어발음에 온 가족이 쩔쩔 매다시피 했다. 한국에 있을 때 많은 시간을 영어에 할애하고 시간과 금전을 적잖게 투자했었는데 나의 영어실력이 이렇게 형편없을지는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하루는 맨해튼 관광을 가고자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어느 한국 사람이 우리가족을 보더니 “이민 오신지 몇일 안됐죠?” 라고 묻길래 깜짝 놀라서 서로를 쳐다 봤더니 우리 가족의 모습은 누가 봐도 영낙없이 방금 이민온 가족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고 난 허리에 매는 작은 가방에 한국에서 살던 34평형 아파트 판돈을 여행자 수표로 바꿔서 우리 가족의 생명처럼 소중히 차고 다녔으니 아무렴 그랬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 한 푼 지출할 때 마다 바짝 긴장했고 최소의 경비로 살아가야 했으니 매일같이 식탁은 된장찌개, 김치찌개, 아니면 라면이었다. 그래도 맛있었고 누구하나 반찬에 불평이 없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를 하기위해서 휴대폰을 구입하러 갔는데 한국여권 말고는 아무런 미국 신분증명서가 없어 500달러를 담보로 구입해야 했다. 전화카드를 구입해서 가족이며 친구들한테 전화를 하는데 이곳에 온지 불과 1주일도 안됐는데도 모두들 아주 오래된 듯 그리워 하고 이곳의 분위기를 전하며 울기도 웃기도 하며 자주 전화를 했다.
8일쯤 되자 신청한 카드가 도착하여 은행 계좌도 개설하고 운전면허 필기시험도 신청하였다. 많은 돈이 아니었지만 중장기 저축은 미국은행에, 자주 사용하는 돈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은행에 분산하여 저축하였다.
어느날 출금차 우리은행에 들렀는데 창구 여직원의 이런 말을 한다.
“한국에서 이민 오는 많은 사람들을 지켜 봤는데 한국에서 소위 S대학도 나오고 잘 나가던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오면 자신을 너무도 평가절하하고 막노동이나 저임금 노동자로 직업을 찾아가는걸 보면 가슴아파요. 선생님께서도 한국에서 험한 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무조건 막노동으로 뛰어들어 돈버는 것보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시간과 금전을 투자해서 상품가치를 높이세요.”
아주 충격적이고 교훈적인 말이었다. 지금도 귀에 쟁쟁한 그 직원의 말은 지금까지 살아오는데 삶의 신조가 되고 있다.
어쨌든 하루하루 새롭고, 신기하고, 두려운 가운데 시간이 흘렀고 대부분 많은 시간들을 취침으로 떼웠다. 도착하자마자 시간차 적응이 어려워 낮에는 늘 피곤하기도 해서 가족 모두가 밤낮없이 잤다. 작은 애는 별 할 일 없이 먹고 자다보니 살이 찌기 시작했고, 어쨌든 시간차로 인한 피로는 완전히 해결됐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불안감이 늘어가는 가운데 아내가 한국에서 다니던 절의 한 보살님 딸이 뉴욕에 살고 있다고 하니 정보나 의견을 들어보자해서 여러 가지 교통수단을 갈아타면서 어렵게 가족 모두가 그곳으로 찾아갔다.
3월이라 하지만 곳곳에 많은 눈이 쌓여 있고 인적이 드문 아주 한적한 곳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커피를 한잔 나누며 한참을 얘기했는데 우선 아이들의 교육환경여건을 위해서는 현재 거주하는 곳은 추천할만한 곳이 못된다하여 이분이 살고있는 주변 지역에 렌트 아파트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며칠후 그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직업이 없고 크레딧 점수가 없어서 쉽게 렌트집을 구할 수가 없었는데 마침 세탁소 고객중 한 사람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의 2층을 렌트 주겠다고 하여 집을 한번 보기로 했다. 맨해튼의 북쪽, 자동차로 약 40분쯤 떨어진 허드슨 강변에 위치한 아주 한적한 2층집으로 영화에서나 보던 오래되고 아름다운 집이었다.
벽난로와 다락방으로 연결되는 예쁜 사다리가 있고, 방은 1개였지만 거실을 침실로 사용할 수 있을뿐 아니라 특별히 다른 집을 선택할 여지가 없었으므로 이곳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보름동안 정 들었던 Flushing에서 다시 짐꾸러미를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뉴욕주 나이약(Nyack)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