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뉴저지 코이트빌(Coyteville)에서 1933년 5월31일 태어났다. 코이트빌은 증조부가 개척한 곳으로 그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도시가 명명됐다. 내 가운데 이름(middle name)도 도시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이러한 집안의 전통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레이드(Grade) 학교를 다니다가 버몬트(Vermont)로 이사했다. 195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소식을 듣고 자원입대하였다.
아버지는 1차대전, 형은 2차대전, 그리고 조상들이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군 전통 하에서 자랐기때문에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의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애국심으로 자원했던 것이다.
한국전쟁과 한국이 여전히 분단되어 있는 것은 미국의 책임이 크다. 2차대전 직후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은 잘못됐다. 미국의 2차대전 이후 세계 정책으로 인해 한반도와 한민족이 여전히 분단(分斷)된 것이 미국인의 한사람으로 너무나 미안하다.
씨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일본과 체결한 카쓰라-태프트 밀약(Katsura-Taft Secret Agreement)으로 인해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 아닌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 스탈린 그리고 처칠 수상이 주도한 전후 식민지 처리문제에서 한국 분단의 원인이 시작됐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도를 놓고 한국에 대해 공부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는 한국의 역사를 아는 편이다.
1893년 미국의 전쟁성은 만약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 수립에서부터 이미 한국은 희생물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전쟁성 전략은 ‘오렌지 계획(Plan Orange)’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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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시 미 국무부 장관이었던 딘 애치슨(Dean Acheson)은 진보적 사고를 가진 정치인으로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심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애치슨 선언’이 결국은 북한의 침공(侵攻)을 초대한 것이나 다름 없다.
나는 한국전 참전을 위해 1950년 12월 샌 안토니오의 라클랜드 공군기지에서 B-29의 기관총 사수가 되는 교육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눈이 좋지 않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기본 군사훈련을 마친 후 뉴욕의 샘슨 비행단으로 배치되어 공군 헌병부대에서 범죄조사의 업무를 주로 수행하였다.
1952년 10월 샌프란시스코에서 17일 한국으로 향하는 배에 승선하여 일본, 김포를 거처 38선 근처의 Radar Intercepter post에서 보안을 담당하는 업무에 종사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유엔군 그리고 한국인들의 범죄를 수사하는 일을 맡았다.
당시 한국에 파병되기를 싫어했던 미군들이 주로 범죄에 가담했다. 그들은 군 입대 전 경범죄를 범한 경우가 많았는데 한국에 파병되는 것을 조건으로 과거의 범죄행위를 눈 감아 주었다.
범죄의 종류는 예를 들어, 미국 PX물품을 밀수하여 한국시장과 사람들에게 파는 행위가 주였다. 또한 빨래 또는 동네의 닭을 훔치는 병사들도 많았다.
이렇게 질 나쁜 미군병사들은 한국인들을 무시하기도 했다. 미군 병사들이 한국 여성들을 다루는 태도에 분개하기도 했고 여동생을 파는 한국인들을 보면서 화가 나기도 했다.
연합군은 미군은 물론 타이, 콜롬비아, 프랑스, 영국을 포함한 것으로 지역의 한국경찰과 협력하였다. 대만과 콜롬비아의 군인들은 마약을 거래하기도 하였다. 한국인의 범죄는 주로 도둑질이었다. 통역을 맡은 한국인과 함께 북한군 소위를 신문(訊問)한 적도 있다.
한국참전을 계기로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국의 문화는 전통이 강했고,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매우 정직했다. 한 노인은 돈이 많이 든 미군 병사의 지갑을 돌려주는 일도 있었다.
지향리라는 시골에서 한국인 가정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순찰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한 한국인 가정에서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하였다. 언어 차이로 대화도 못하며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을 힘들어하자 주인이 수저를 가져왔다.
떠날 때 그 수저를 선물로 주어 지금도 그 수저를 보관하고 있다. 그 때 그날의 기억을 지울 수 없다. 훗날 이 이야기를 들은 다른 한국인이 수저 세트를 선물로 보내주기도 했다.
2009년 재방한을 통해 한국인들이 이룩한 발전상을 알게 되었다. 이 방한을 통해 한국전쟁이야말로 미국이 개입한 전쟁 중 가장 위대한 전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참전을 결정한 미국의 결정은 잘된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하우스 보이였던 고진호씨를 찾고 싶어 방송을 통해 수소문 하여 대구의 한 병원에서 찾는 행운도 있었다. 현재 나는 유타 스프링데일에서 한국전쟁과 참전용사에 관한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신문칼럼도 정기적으로 기고하는데 벌써 270회를 넘겼다.
* 인터뷰 말미에 쿠퍼 참전용사는 한국전참전용사 디지털기념관 재단이 7월25일부터 28일까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개최하는 제2회 한국전 참전용사 후손 컨벤션을 소개하였더니 대학 재학중인 손녀와 함께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
지금까지 인터뷰한 많은 참전용사 중 가장 한국전쟁과 분단의 역사적 국제정치학적 배경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이 참전용사에게 후손 컨벤션에서 기조연설을 부탁하였고 흔쾌히 수락하였다. 한국과 미국의 현 동맹관계의 기본이 되는 이러한 참전용사가 자신들의 유업을 잇고자 결성한 후손 조직 컨벤션에서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전하는 의미있는 제2차 한국전 참전용사 청년 봉사단 컨벤션이 될 것이다.
참고로 한국전 참전용사 디지털 기념관 재단은 2013년 7월26일 평균연령 85세인 한국전 참전용사의 유업(遺業)을 이어가기 위한 목적으로 참전용사의 후손 중 고등학생 또는 대학생을 초청하여 “한국전 참전용사 청년 봉사단”을 발족시켰다. 2013년 봉사단 발족 컨벤션은 현대자동차, 팬택, 한국무역협회의 후원으로 가능했고, 올해부터는 디지털 기념관 재단이 보훈처와 관련 기업의 후원으로 매년 7월말 워싱턴에서 후손 컨벤션을 개최하며, 미국과 전세계의 참전국 후손들이 그들이 살고있는 지역의 참전용사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이 소장(所藏)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여 디지털 기념관 재단에 보내어 전세계적인 한국전쟁에 관한 역사적 기록을 확대하게 된다.
현재 디지털 기념관 재단 (www.kwvdm.org) 에는 약 250개의 참전용사 인터뷰와 6천점이 넘는 역사적 자료를 데이터 베이스화 하였다. 2014년 부터는 미국 역사교과서에 매우 짧게 언급되어 있는 한국전쟁에 관한 기록을 확대하기 위한 청원운동에도 돌입한다.
인터뷰/ 한종우 한국전참전용사 디지털기념관재단(www.kwvdm.org)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