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 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국의 위대한 사상가 헨리 데이빗 쏘로우의 명저 <시민의 불복종>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쏘로우는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人頭稅)의 납부를 거부한 죄로 투옥당했으나, 그때 경험을 기초로 시민의 불복종을 썼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의 부당한 횡포를 고발하고 이에 대한 사회의 침묵이 온당한 것이냐에 대한 성찰의 위대한 기록입니다.
당시 쏘로우가 인두세 납부를 거부한 것은 자신의 세금이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근간이 되고 멕시코 침략전쟁의 자금원이 된다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기때문입니다. 쏘로우는 한명의 사상가 이상입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와 윌리엄 예이츠 등 수많은 위인과 문호들에게 영향을 준 위대한 인물이니까요. 그래서 쏘로우를 ‘위인들의 위인’이라고 표현한 블로거도 있더군요.
쏘로우의 대표작은 역시 <월든>입니다. 지난해 입적하신 법정스님이 생전에 가장 사랑한 책은 바로 <월든>이었다고 합니다. 쏘로우가 매사추세츠 콩코드의 호숫가 숲속에 작은 통나무집을 짓고 홀로 2년간 살았던 그곳이 바로 월든입니다. 호수의 이름이죠. 정작 미국인들은 호수가 아니라 연못(Walden Pond)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무소유>를 비롯한 법정스님의 산문집을 읽고 쏘로우의 <월든>을 읽으며 저는 시대와 공간을 달리 한 두 분이 너무도 닮은 삶을 추구했다는 것에 감탄했습니다. 월든을 쓴 이가 법정스님이라 해도 좋았고 무소유가 바로 쏘로우의 저작이라 해도 상관없을만큼 두 분의 사상과 정서는 놀랍도록 흡사했습니다.
쏘로우의 <월든>을 읽고 월든 호수를 가고 싶어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저는 법정스님의 책에서 쏘로우의 월든을 방문한 이야기를 접하고 가고 싶었습니다. 그 오랜 소망은 지난해 이맘때 풀 수 있었고 또 일년이 지난 얼마전 조카와 함께 월든 호수를 다시 한번 갈 수 있었습니다.
법정 스님이 처음 월든 호수를 찾을 때 길을 안내한 분은 뉴욕 불광선원의 주지이신 휘광 스님이었습니다. 휘광 스님은 법정 스님을 모시고 두어번 월든을 방문했는데 처음 갔을 때 법정 스님이 자못 감격어린 표정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쏘로우 선생 제가 왔습니다. 법정이 왔습니다..”
두 분의 공통점이 많아서일까요. 저는 가끔 법정 스님의 전생이 헨리 쏘로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깊어가는 가을, 아니 깊어진 가을이었습니다. 서서히 어스름이 몰려오는 시간 월든 호수엔 사람의 그림자가 없었습니다. 잠시 고민했습니다. 월든의 통나무집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오솔길을 따라 10여분 가야하는데 너무 늦은 시간 외진 곳을 가기가 조금 걸렸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 호젓함이 쏘로우가 생전에 느꼈을 깊고 깊은 고독감을 떠올리는것 같아 발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쏘로우의 통나무집은 요즘 크기로 하면 4평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라지고 약간의 잔해와 터만 남아 있을뿐입니다. 쏘로우가 월든에 묘사한 것을 토대로 호수 입구쪽에 복원한 통나무집에는 침대 하나 작은 탁자 하나 의자, 거울, 냄비 등 식기 몇 개가 전시돼 있습니다.
쏘로우가 집을 짓는데 들어간 총비용은 28 달러가 조금 넘었습니다. 지금 가치로 따지면 3만원밖에 안되는 돈이지만 당시 화폐가치로 보면 90만원쯤 된다는군요. 그래도 엄청나게 싼 비용이죠. 그것은 스스로 노동을 해서 완성한 집이고 헌 널빤지 등 재활용을 한 덕이었습니다.
이렇게 적은 비용으로 비록 작지만 안락한 집을 지을 수 있고 자급자족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쏘로우는 몸소 실천한 것이지요. 촉망받는 하버드 졸업생은 남들처럼 앞날이 보장되는 길을 선택하는 대신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2년여의 삶을 기록한 책이 바로 <월든>입니다.

돌아오는 길 호수에 반사되는 정경은 어느것이 진짜인지 가늠하기 힘들만큼 맑고 투명했습니다.
‘거울처럼 맑고 고요한 마음’을 이르는 명경지수(明鏡止水) 라는 말은 바로 이런때 쓰는게 아닐까요...
어둠이 속살거리듯 다가오는 시간. 지난해 월든을 찾았을 때 보다 더욱 고즈넉한 분위기에 마음은 더욱 애잔해졌습니다. 호수를 벗어나 길을 건너면 복제된 쏘로우의 통나무집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오후 6시를 넘긴 시간 안타깝게도 통나무집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어둑한 창문을 통해 들여다본 쏘로우의 통나무 집은 호수보다 깊은 고요에 잠겨 있습니다..
에필로그
이번 여행이 더욱 의미가 있었던 것은 지난해 실패한 쏘로우의 생가를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를 안내해준 보스턴의 지인 김영종 씨 부부가 얼마전 쏘로우의 생가를 확인했으니 데려다주겠다고 했거든요.
"바로 저기에요!"
차를 몰던 영종씨가 손으로 가리킵니다.
나무 한그루가 살짝 앞을 가린 희고 깨끗한 2층 하우스.
저곳이 바로 지금으로부터 194년전 헨리 데이빗 쏘로우가 태어난 집이었습니다. '쏘로우의 탄생지'라는 사인판이 서 있었습니다. 언젠가 사진에서 봤을 때는 빨간색 집이었던 것 같은데 새로 칠을 한 모양입니다.
그저 경계에 불과한 야트막한 담이 있었고 우체통도 앞에 있었습니다. 지금 저곳에 사는 이는 위대한 사상가의 체취를 느끼고 있을까요.
문득 통나무집이 있던 터에 서있던 '경구'가 생각이 납니다. 쏘로우가 <월든>에 왜 자신이 숲으로 들어가 살았는지를 설명한 것이었지요.
“나는 인생의 본질적 사실들만을 대면하면서, 진지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에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인생이 가르쳐주는 것을 배우고, 내가 죽게될 때 삶을 진정으로 산 적이 없다는 걸 발견하지 않기 위해 숲으로 들어갔다.” -쏘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