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본 북동부지역 지진, 방사능 누출 뉴스로 가까운 나라 한국은 떠들썩 합니다. 운이 좋은 건지 저는 1월에 귀국하면서 지금의 위험과 혼란을 살짝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요즘 일본 정부의 행동을 보면 그다지 응원해 주고 싶지는 않지만 영토 분쟁과 인도주의적 감정은 별개의 일이니 일본의 피해자들이 빠른 시일 내에 힘든 상황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기도를 해봅니다.
매일 일본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 들리는만큼 분위기 전환차원에서 즐거운 내용을 전해 드릴까 합니다. 도쿄의 일상적인 삶은 서울보다 좀 빠듯합니다. 정신없이 얽혀있는 전차와 지하철 지도만 보아도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신주큐와 시부야에 가면 사람들이 무엇때문에 이렇게 많이 모여 있나 싶으니까요.
다들 자신들의 삶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겠지만 제게는 그냥 무언가에 쫓겨 지하철을 이용해 도망치는듯 보였으니 도쿄라는 도시가 그리 긍정적으로 다가 온 곳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도쿄를 조금만 벗어나면 완전히 반대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천이 아름답게 흐르고 집집마다 소담스레 열린 유자와 귤들이 여유롭고 풍요로운 일본의 삶을 대변해 주는 듯 합니다. 6개월간의 일본어 연수 기간 중 도쿄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하코네를 다녀왔던 기억이 납니다.
하코네는 한국인들에게도 온천으로 아주 유명한 도시입니다. 대중목욕을 즐기지 않는 저는 두 가지 다른 목적을 갖고 하코네를 방문 하였습니다. 부사(富士)의 고향(?) 후지산 보기, 그리고 쿠로타 마고(흑달걀)를 맛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부사의 고향이 후지산이냐고 하는 분들이 있을 듯 합니다. 엄연히 말하면 오해에서 비롯된 부사의 출신지입니다만 부사를 일본어로 읽으면 후지입니다. 부사가 일본 개량종자임을 알고 있는 사람도 후지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부사의 고향을 후지산이라고 한 것이고요. 원래는 후지사키라는 사람이 한 사과 종을 개발 하였고 그의 이름을 따서 ‘후지’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합니다.
여담이지만 한국에 들어 와 있는 과일 중 많은 종이 일본에서 개량되어 넘어 온 것을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부사, 한라봉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라봉이 제주가 아닌 일본에서 개량된 품종 이라는 것에 조금 실망하신 분들이 있을 것 같네요.
그럼 하코네 여행을 시작해 볼까요. 일단 하코네를 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가장 간단하고 빠른 방법은 로만스카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철도가 발달한 일본은 어디든 기차를 이용해 갈 수 있는데요 가격이 조금 비싸긴 하지만 기차를 이용해보면 정확한 배차간격과 깨끗한 시설에 일본이 얼마나 철저하고 꼼꼼한 나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약 1시간 30분간 로만스카를 타고 달리다 보면 하코네 역에 도착합니다. 하코네 역 주변은 온천을 포함하고 있는 료칸(여관)으로 가득합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우리 나라 여관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라고 합니다. 와식(다다미를 기본으로 한 일본 전통방)으로 꾸며진 방과 아주 친절하고 정갈한 서비스와 식사는 한번쯤 경험해 볼 만하지요.
하코네에 도착하여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열차를 타면 하코네 등산 열차를 탈 수 있는 오다하라 역으로 갈 수 있습니다. 오다하라 역은 일본의 유일한 산악열차로 유명한 하코네 등산열차의 시작점입니다.
이 등산열차는 지그재그로 올라가게 되는데 12.5m를 움직일 때 마다 1미터 높이를 올라 간다고 합니다. 산악 열차 하면 스위스가 생각 나는데요. 그래서인지 오다하라 역에 가면 스위스에서 우정의 표시로 보내준 우호의 카우벨(Cow Bell)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종착역 고라 역에 도착하면 케이블카를 타고 오와쿠다니(하코네의 유황화산)로 향하게 됩니다. 오와쿠다니에서 내리면 인간 방귀의 몇천배는 될 것 같은 독한 유황냄새가 코를 자극합니다. 천식이나 기관지에 문제 있으신 분들은 출입금지라고 하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유황냄새로부터 정신을 차리고 후지산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웬일인지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 온 줄 알고 관광센터에 가서 물어보니 오늘 구름이 많아서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이곳 직원은 일본인 특유의 미소와 함께 “후지산은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자신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답니다”고 하네요.
정말 웃는 얼굴에 강펀치 몇 대 날려주고 싶었습니다. 저로선 후지산을 못 보는 것이 심각한 문제였는데 그렇게 실실 웃으며 설명을 해주니 속이 꽤 상하더라구요.
할 수 없이 2번째 목표 쿠로타마고(흑달걀)을 먹으러 향했습니다. 검정달걀을 유일 하게 맛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인파를 따라 걷다 보니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달걀이 검정색인 이유는 오우쿠다니의 유황(硫黃)이 섞인 물에 삶았기때문입니다. 4개에 7000원이라는 거금을 지불하고 부푼 기대로 먹었지만 맛은 보통의 삶은 달걀과 별반 다르지 않더군요.
유황 냄새에 킁킁대며 쿠로타마고를 먹고 등을 돌려보니 후지산이 구름에 몸을 반쯤 숨긴 채 나타납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고 하더니 제게는 생각보다 빨리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네요.
후지산을 올라 보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바라본 모습은 정말 장관(壯觀)이었습니다. 일본 드라마나 사진을 통해서만 보았던 산 정상이 눈으로 살짝 덮인 모습을 보고 나니 무언가 꽉 막혀있던 가슴 한 구석이 뻥 뚤린 기분 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일 후 일본을 떠났습니다. 신기하게도 비행기를 타고 가다 창문 밖을 보았는데 구름위로 후지산이 고개를 들어 저게 인사라도 하듯 나와 있었습니다. 벌써 저와 후지산은 친구가 된 것 같네요. 여러분들도 후지산의 친구가 한번 되어 보시는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