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경기장 한 가운데로 강렬한 스포트라이트가 결선에 오른 견공(犬公)들을 하나씩 비추고 있었다. 마지막 한바퀴 도는 행진을 끝낸 7마리는 제자리로 돌아가 흐트러짐 없는 멋진 자세로 다시 섰다. 실내 조명이 들어옴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터지는 함성, 박수갈채 그리고 쉭쉭~ 불어대는 휘파팜소리들로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 2015년 최고중의 최고(Best of Best)를 발표하겠습니다." 세명의 심판들이 정 중앙을 향해 은빛 트로피와 노랑과 보라가 어우러진 둥근 꽃리본을 들고 나왔다. 경기장 내 대형 모니터에는 발표를 앞둔 긴장된 심판의 손동작, 눈빛 나아가 심호흡까지도 놓치지 않고 절묘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2월 17일 화요일 밤 11시가 넘은 시각 2만여 관중들이 자리를 빼곡하게 매운 실내 경기장에서는 웨스트 민스터 캐널 클럽(WKC)이 주최한 'Dog Show' 의 하이라이트인 대상 발표를 남겨두고 있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온 애견들이 총 2,700 여 마리가 경합(競合)을 벌인만큼 엄청난 경쟁을 뚫고 챔피온 자리에 오르는 녀석은 과연 누가 될지 모두가 귀를 쫑긋세우고 있었다.
"여러분, 1877년 시작했던 이 쇼가 어느덧 올해로 139 회를 맞았습니다......" 심판이 입을 떼었다. 관중석은 고요했지만 폭발 일보직전의 달궈질대로 달궈진 흥분과 긴장은 유감없이 감지되었다.
"올 해의 챔피온은...... 15인치 스탠다드 비글(Standard Beagle) 미스 P입니다."
'...............................................??'
환호성으로 장내가 떠나가야 할 분위기였지만 일순 '뭔가 잘못된것 아닌가' 어리둥절해 하는 기색(氣色)들이 역력했다. 사람들의 기대를 외면한 결과여서 그랬는지 반응은 뜨겁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냉소적이기 까지 했다 .그곳에 모인 대다수가 회색과 흰색의 털이 북실북실한 유달리 매력적인 걸음걸이로 관중을 사로잡았던 올드 잉글리쉬 쉽독(Old English Sheepdog) 아니면, 일명 오바마 독이라고 불리는, 멋진 기립자세를 뽐내던 포르트기쉬 워터 독(Portuguese Water Dog)이 최고의 자리에 오를것이라고 믿었던것 같다.
▲ 일명 오바마 독으로 불리는, 멋진 기립자세를 뽐내던 포르트기쉬 워터 독(Portuguese Water Dog)
▲ 올드 잉글리쉬 쉽독(Old English Sheepdog)
그도 그럴것이 두 견종 다 결승에 올랐던 화려한 경력이 있었던 만큼 올 해는 성과가 있을것이라는 것과 몇년 간 소형견이 대세였던 만큼 이젠 대형견이 뽑힐 차례라는 기대 또한 지배적이었다.
심판은 '미스 P'를 선정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실수가 없었다, 완벽했다'라고 치켜 세웠지만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며 '그래도 이건 아니지' 라는 반응이었다. 스누피 만화 캐릭터로 잘 알려진 비글이 뽑힌것을 두고 독 쇼에 관해 일가견이 있다는 한 관계자는 '코믹했고 배신 당한 느낌'이라고 일축했으며 이미 정해진 '쇼(Show)'에 순진한 들러리들만 많았다며 주최측을 향해 거침없는 쓴소리를 내 뱉기도 했다. 몇 해전 챔피언으로 뽑한 비글종 '우노'의 그 혈통을 2대째 물려받은 미스 P의 선발에 대중들은 모르는 어떤 정치적인 꼼수가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결선에 오른 7마리 모두 일년동안 수많은 대회를 거쳐 선발된 만큼 혈통, 골격, 매너, 모질, 미용, 자세, 수상경력 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김이나 역할 그리고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견종들간의 경쟁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한편 모순이 아닌가도 싶었지만 쇼를 통해서 챔피온이 상징하는 의미가 워낙 크다보니 최종 심사의 기준이 좀 더 공개적이고 명확했더라면 좋았을것을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다른 해와 비교했을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관중들이 많아 어수선 했지만 시상식은 곧 진행되었고 주최측 전문 사진사들은 챔피온 독의 자세를 잡아가며 클럽회원들 기념사진들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서 귀에 거슬릴 정도로 힘주어 나오는 방송이 있었는데 "알립니다. 사진기자들은 지금 나오시면 안됩니다. 따로 안내방송이 나갈때까지 제 자리에서 기다려 주십시요. 거듭 당부 드립니다"라는 멘트가 연거푸 이어졌다. 표현은 무척이나 정중했지만 허락없이 함부로 무대로 나오지 말라는 단호한 경고(警告) 메시지였다.
(이런 속된 표현을 써야 하는것이 심히 유감스럽지만)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개 떼'처럼 우~ 하고 몰려가서 치열한 자리다툼을 위해 몸싸움 하는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무질서하게 2중 3중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사진을 찍다보니 위험천만한 경우도 많고 챔피온 독과 핸들러 얼굴 가까이로 들이미는 카메라들로 위협감까지 드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얼마나 심했길래 저런 경고멘트가 나오고 아예 경계선까지 만들어 놓고도 못미더워서 안전요원들을 배치하여 몸으로 막게 되었는지 혀를 찰 노릇이었다.
물론, 무대라고 해봤자 한 뼘 높이인데다가 원형의 지름이 2미터도 채 안되다보니 챔피온 독과 키 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는 엎어져야 하고 눕기도 하는등 돋보이는 각도의 빼어난 사진을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겠지만 그 정도가 다른 행사와 비교했을때 거친 것은 사실이다. 촬영에 충분한 시간이 할애되고 백미터 전방의 대상도 고화질로 선명하게 잡아당겨 찍을 줄 아는 전문기기와 기술로 무장한 이들이 하나같이 격렬한 몸싸움을 해가며 찍어대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더러 앞 사람의 체격이 크고 높아 앵글에 방해가 될라치면 물리적으로 어깨를 사정없이 짓누르기도 하고 모자가 시선에 방해라도 된다 싶으면 '빌어먹을 모자부터 벗겨라'는 식의 말은 기본이다.
▲ 찍을때 뒤에서 밀어 버리면 이런 사진도 종종 나온다.
때론 거친 욕설과 고성이 오가는 상황은 주먹다짐만 없었을뿐 양아치 세계와 다름없어 보였다. 여기가 특별히 '개 쇼' 라서 유독 키 크고 힘센 놈이 최고라는듯, 말 그대로 '개 판'을 보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이럴때마다 챔피온이 소형견이 아니었더라면 저 지경까진 되지 않았을텐데 라는 생각도 든다. 독 쇼 자체가 동물을 사랑하고 애견인구를 늘리고 동시에 천문학적인 애견산업을 도모하는데 목적이 있는 만큼 다양한 애견인들을 독려하는 차원에서라도 대형견에서도 나오고 대중에게 인기 없는 견종에서도 나오면 좋았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있다. 하다못해 소형견 촬영땐 엎어지거나 눕지 않아도 되도록 주최측에서만 기념촬영 할 때 쓰는 높은 단상이라도 잠시 쓰도록 허용을 해야 하는것 아닌가 싶다.
뉴욕시의 크고작은 행사를 다녀봤지만 독 쇼를 취재하는 이들에게선 좋게 말해 치열한 직업정신이지, 무례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행태들이 많다. 애견 사진을 찍으러 오는 이들이 기하급수적(幾何級數的)으로 늘어나면서 한정되고 좁은 공간에서 사진을 찍다보니 경쟁이 심한것은 이해하지만 카메라의 사양과 렌즈의 길이로 차별하는 분위기 또한 결코 어제 오늘이 아니다. 동물의 움직임을 포착하는데 전문가용 첨단기기만한 것은 없겠지만 개 쇼가 기사에 곁들여 쓸 한장의 스냅 컷을 목적으로도 충분히 올 수 있는 자리임을 적지않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것 같다.
기종이 구닥다리로 보인다거나 코가 납작한 즉, 망원렌즈가 없이 찍거나 스냅카메라를 가지고 찍는 이들은 은근히 디스하면서 '여긴 취재를 위한 자리'라며 앞자리를 내달라는 요구들도 대놓고 '관광객은 관람석에 가서 찍으라'고 비아냥 대기도 한다. '돈벌이 용 사진' 만을 찍기위해 오는 이들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개 쇼'라서 수준이 저정도 밖에 안되나 싶어 회의가 들기도 한다.
▲ 늠름한 자세로 심사를 받고 있는 화이트 불테리어
쇼에 참가하는 독을 보면 일반 견들과 사뭇 다르다. 오랫동안 반복된 습관과 혹독한 훈련 때문인지 사람을 대하는것, 먹이를 먹는것, 신호나 규칙을 지키는것 등등 절제된 행동들로 차별성을 보인다. 이렇듯 개들도 의젓하고 우아한 모습을 보일진대 무례한 말이나 행동을 서슴치 않는 거친 이들을 볼라치면 짜증스러움이 밀려온다.
복잡하고 정신없는 촬영중에도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웃음을 터지게 만드는 일도 독 쇼 현장에서만 건질 수 있는 광경이다. 맘에 드는 사진을 얻을 때까지 애견 전문 사진사들은 소리나는 장난감을 주머니속에 한두개씩 들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마다 '삑~ 삐비빅~ '소리를 내어 가며 주의집중을 시킨 뒤 그 찰나를 이용하여 요령껏 찍는다. 장난감이 없는 이들로서는 뭔가 특이한 행동을 하거나 소리를 내야 주의를 끌 수 있다보니 온갖 요상한 소리들을 내기도 하는데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의 배꼽빠지게 웃기는 진풍경(珍風景)들이 종종 터진다. 각양각색의 재미난 포즈와 웃기는 소리들을 내가며 찍는 이색 취재현장은 어쩌면 견공들로 하여금 '쇼'가 따로없다며 박장대소(拍掌大笑) 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챔피온이 된 견공은 가문의 영광으로 영원히 기록됨과 동시에 다음날 부터 쪽잠을 자가며 강행군(强行軍)을 하는데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방송국 출연부터 시작해서 신문, 잡지 심지어는 파워 블로거와의 인터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스케쥴을 감내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대접받는 '스테이크 세레모니'와 '엠파이어 스테이트 전망대 야외촬영'을 마치고 나면 적쟎은 매체에서 쇄도하는 사진촬영을 소화해야 하고 바야흐로 화려했던 쇼를 뒤로하고 은퇴를 하게 된다.
▲ 올해부터는 챔피온 독에게 일정거리 이상 근접할 수 없도록 줄을 쳤다.
몇 해 전 독 쇼에 참가해서 고령에 속했던 열살박이였던 '나무밑둥'이라는 이름의 스텀프(Stump) 라는 녀석은 은퇴 후 병원을 돌면서 소아 암 환자들에게 안기어 '힐링 치료'를 담당할것이라고 했다. 그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은퇴 후 열에서 아홉은 혙통을 잇는 일에 몰입하게 된다고 하는데 '미스 P' 역시 네살박이 암컷으로 고향인 캐나다로 돌아가자마자 신부수업(!)을 받을 예정이라 하니 머지않아 엄마가 되는 정해진 수순을 밟게 될 것 같다.
태어나면서부터 오늘의 챔피온 자리에 이르기까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을 .보냈을 '미스 P'는 그동안 체중때문에 맘놓고 먹지 못했다는 좋아하는 간요리를 실컷 먹어가며 일상의 반복되던 고된 훈련대신 여유를 만끽하게 될 게 자명하다. 오늘도 훗날의 미스 P를 꿈꾸며 조련사와 더불어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수많은 이름없는 '쇼 독(Show Dog)'들 또한 언젠가 고생한 만큼 좋은 결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가득하다. 아무쪼록, 독 쇼에서 만큼은 눈쌀 찌푸리게 만드는 개판이 아닌, 견공들이 주인공이 되는 말 그대로 즐겁고 유쾌한 'Dog Show' 만 봤으면 하는 바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 제목 A Victory Figure Croquis 2015 종이에 혼합 염료 설명/ 오래전에 한 권투선수가 우승소감을 묻자 대뜸 나온 소리가 '엄마, 나 챔피온 먹었어요' 였다. 양 손을 높이 치켜 올린 포즈에서 챔피온에 이르기 까지 최고에 오르기까지 독 쇼라고 다르지 않을것 같다. 그 세계에서 챔피온의 자리에 오르는 것 역시 인간 세상 이상으로 길고 험난하며 지루한 여정일것임이 분명하다. 독 쇼에서 우승한 챔피온에게 우승 소감을 묻는다면 과연,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하다.
<下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