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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일출’ - ‘개구리 뒷다리’ 덕분에 풍성했던 1박2일<下>

글쓴이 : 김치김 날짜 : 2014-01-21 (화) 09:14:01


 






어디서 어떻게 1박 2일을 치를 수 있을지가 관건(關鍵)이었다. 먼저, 두가지를 기준으로 정했다. 서울이 아닌 멀리서 오는 식구들의 동선을 그려볼 때 공항과 고속버스에서 접근성이 좋은곳이어야 하고 노인이 움직이기에 힘들지 않은 곳 그리고 가능하면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면 ‘동가홍상(同價紅裳)’ 이겠다 싶어 낙점된 곳이 ‘강화’였다.





지역을 정하고 나니 이젠 마침한 곳을 찾는게 코 앞의 숙제였다. 강화에서 살다 나온 지인이 조언을 해줬지만 십년이란 세월의 간격이 커서 그런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질 못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입소문이 난 곳을 찾았으나 나름 위치나 시설면에서 인기있는 곳은 예약이 다 차버려 일주일 앞둔 상황에서는 직접 보고 결정하는 게 최선이겠다 싶었다.






강화.....더듬어보니 신촌역 앞에서 친구들과 시외버스 타고 훌쩍 다녀오곤 했던 곳, 서울에서 1시간 남짓 걸리는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도 오일장이 서곤 했던 시골냄새가 물씬했던 곳, 이름만 섬이지 육지와 다름없이 느껴지던 곳이었다.






언젠가는 강화로 작업실을 옮겨 아예 정착(定着)을 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 이유는 ‘전통한옥’이 한 채 매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가격은 1300만원으로 빈 집의 폐가가 거진 그렇듯이 지붕이 내려앉고 흉물스러운 몰골이었으나 결 좋은 춘양목으로 지은 집이라 집에 운치가 있었다. 비록 기울긴 했으나 때깔좋은 육송의 기둥들이 보기좋게 어우러진 족히 백년은 훌쩍 넘어보여 바짝 욕심을 내었으나 집값의 서너배나 되는 개보수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안되어서 놓아야 했다.






한 때는 밤낚시에 꽂혀 주말이면 밤새도록 수면의 찌를 응시(凝視)하다가 새벽녁 저수지에 물안개가 뽀얗게 오를 즈음이면 낚싯대를 걷고 돌아오곤 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겉멋 들던 시절 반했던 것은 '낚시'가 아니라 '저수지의 정적'과 버너에 옹색하게 끓여 먹던 '라면 맛'때문은 아니었나 여겨지기도 한다. 밴댕이회와 전어회를 처음 맛본 곳도 거기였고 민물 생새우와 조개젓의 깊은 맛을 알게 된 곳도 강화였고 보니 두루뭉실하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 물이 빠지고 난 뒤의 서해 바다의 뻘 밭은 장관이다.





김포를 지나 철책선이 보이던 2차선 길을 따라 강화에 이르는 동안 예전과는 달리 생경스럽다고 느껴졌다. 세월의 더께 때문인지 숱한 건물들 때문인지 많이 낯설게 보였으며 무엇보다도 1300여 개나 된다는 펜션들이 강화에 밀집해 있다고 듣고 보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륙으로 갔다가 해안도로로도 갔다가 발길 닿는대로 돌았지만 막상 입에 맞는 떡은 없었다. 더군다나 계단을 이용하지 않고 1층에서 해결 할 수 있는 시설이 된곳은 거의 없었다. 운치있는 모양을 갖춘 곳도 많았고 다락이랄지 월풀이랄지 주로 연인들이나 핵가족들이 이용하기 위한 곳들은 넘쳤지만 대식구가 '헤쳐, 모여' 할 수 있는 곳은 많아 보이지 않았다.







제주, 거제, 진도에 이어 네번째 큰 면적의 섬인 강화를 우습게 보고 좌충우돌(左衝右突) 식으로 '길라잡이' 없이 달랑 지도 한장만 가지고 돌다보니 시간은 가고 마침한 곳은 찾아지지 않았다. 날은 곧 어두워져가는데~ 찾을 수 있을지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공사현장 한곳을 지나게 되었다. 완성된 곳은 아니었지만 서해 바다의 뻘 밭이 한 눈에 들어오는 조망이 좋은 곳이어서 이곳이라면 낙조(落照)를 감상하기엔 더할나위 없어 보였다. 어쩌면 우리 가족의 모임이나 성격이 그곳 풍광과 적절하게 어울린다 싶게 여겨졌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조차도 다 모이지 못했던 가족들이 이의없이 모두 모이기로 한것은 잦은 입퇴원으로 식구들도 못알아 보고 환청과 환시 환각 증세를 보이던 엄마가 회복되는 놀라운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9월 초 퇴원을 하고서도 계속된 이런 섬망 증상들은 치매로 오해받기 좋을만큼 흡사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구름 걷히듯 예의 인지력과 기억력 좋던 모습을 찾고보니 모두가 잃어버린 엄마를 찾은 심정과 같게 느껴졌다. 11월 중순이 넘어가면서 회복을 확신하게 되었고 잘 이겨낸 엄마에게 축하와 박수를 힘껏 보내드리고 싶었다.



 

 





우리 역시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예상치 못했던 병에 마주하거나 뜻밖의 사고 등을 당하는 일이 있고보니 묵시적으로 얻은 '나중이 아닌 지금' 이라는 교훈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일이 아닌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지 늦게나마 자각했다고 말할까. 돌아가신 후 제삿날 만나는 것 보다 생전에 건강하실때 자손들이 한번이라도 더 만나고 정을 나누는 것이 가족간의 화목에 얼마나 중요한 밑거름이 되는지 일깨워준 셈이다.




 






엄마를 위한 모임이니만큼 편한 복장에, 편한 마음으로, 이왕이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와 달라고 했다. 강화에 들고 나는 길 함께 움직이는 것도 좋겠다 싶어 큰 차량을 빌렸다. 다만, 엄마께 드릴 선물만 챙겨오길 당부했다. 모임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엄마는 ‘한복’을 입으시겠다고 하셨다. 우리 모임의 성격과 취지를 다시 말씀드렸다. 직계 가족들만 편하게 모이는 자리이니 만큼 엄마도 제일 편안하신 옷이 좋겠다고 했지만 당신은 비록 자손들 앞일지라도 '격을 갖추고, 예를 갖추는 옷’으로 한복 만한게 없다 하셨다.







듣고보니 그도 좋은 생각으로 여겨져서 추임새를 넣었다. 동정을 새로 달아드리겠다며 옷을 꺼내주십사 했더니 서랍장 안의 분홍빛 보자기에 싸여있던 한복을 펼쳐 보이셨다. '......' '옷에 얼룩도 있고, 유행도 지났고~ “다른 것 입으시면 어때요?” “아직도 입을만한데 왜?” 괜챦으니 세탁소에 맡겨 달라고 하셨다.








엷은 오동꽃 색 치마 저고리에 짙은 가지색 고름이 붙은 고운 빛깔 한복으로 유행을 거스르지도 않았고 얼룩이나 큰 흠도 없었지만  다만 한가지, 영정사진 속에 있는 한복이라는것이 영 편치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옷 만큼은 안되겠다 싶어 세탁소에 맡겼던 한복을 찾아왔다. 

 





한복집에 옷을 주고 그 크기에 맞춰 맞추려고 찾아 다녔다. 한곳은 닫혀 있었고 한 곳은 열려 있었다. 빛깔 고운 환한 색으로 치마길이도 짧게해서 발에 걸리지 않게 하고 배래도 덜 굴려서 입기 편안한 고름도 작고 간단하게 달아서 입고 벗기 편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런 주문은 시간상 어렵겠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직접 오셔서 칫수를 재어야만 하는 옷이라서 대충 만들 수 없다고 했다. 식구들은 내 생각에 반대했다. '공연한 낭비'라는 것과 언제 또 한복을 입으실 일이 있겠냐며 평상복이라면 몰라도 말꼬리를 흐렸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방 여섯개와 몇십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도 족할 가족실을 빌렸다. 단독으로 쓸 수 있는 바베큐 장소도 해결이 되었고 대가족인 만큼 저녁은 밑반찬을 기본으로 싸가지고 와서 바베큐를 하는 것으로 아침은 과일과 빵 등으로 점심은 식당에 가기로 했다. 노래방 기계 일체를 가지고 와서 가족들의 여흥을 돋우기 위해 아들 친구가 오겠다는 의견은 가족들끼리만 조촐하게 하는 취지인 만큼 정중하게 사양했다.







엄마와 하루 먼저 도착해서 서해 바닷가를 돌다가 근사한 낙조를 볼 수 있으실거라고 하니 “해지는 것을 보면 웬지 마음이 쓸쓸하고 서글프더라”는 말씀만 하셨다. 다행히도 그날 구름이 잔뜩 껴서 낙조는 없었다. 바닷바람이 부는 바닷가 바베큐 장에서 숯불구이는 순조롭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담된 각자의 역할 속에서 “엄마, 이거, 아 하세요” “이것도 드셔보세요” 라며 덩치가 큰 새들 여럿이 작아진 어미새에게 먹이를 나르듯 쉴 새 없이 나르고 있었다.








장작불이 다 탈 때까지 두세시간 여 동안 먹고 마시면서 모처럼 만난 식구들 간에 이야기꽃을 한창 피우면서 케케묵은 이야기도 꺼내고, 더러 섭섭했던 묵은 기억들도 털어내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연기속에서 고기를 굽고 다른 한 쪽에서는 마시고 한쪽에서는 스마트 폰을 이용해서 노래도 틀고..... 사진들도 연신 찍어대고......사진을 시도때도 없이 찍어대던 나는 똑딱이 카메라를 아꼈다. 대신 ‘기억(記憶)’이라는 창고에 그날의 풍광(風光)을 마치 흑백의 스틸사진을 찍듯이 차곡차곡 쟁여 두었다.







흐뭇한 광경이었다. 아버지 돌아가셨을때도 이렇게 다는 모이지 못했었는데 오늘은 정말 다 모였구나 하시며 흡족해 하셨다. 엄마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경쟁을 해야 할 정도로 엄마는 주인공이었다. “쭈글쭈글한 이 얼굴을 뭐하러 자꾸 찍냐”고 손사래를 치셨지만 시키는대로 ‘치이즈’와 ‘김치~이’를 열심히 따라하고 계셨다.


 

 

 


 

 ▲ 여행지 강화의 골동품 가게에서 발견한 요강. 사위와 장모가 영어와 한글로 일방통행식 (!) 대화가 진지했다. '요강과 그릇의 닮은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장모는 오랫만에 보는 요강이 헤어진 친구 만난 양 너무 반갑고 사위는 요강의 미학과 그 자태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한편의 코미디를 방불케 했다는!





여러명이 서로 경쟁적으로 하나 둘 셋 하면서 시간을 두고 찍어대다보니 둘 반 쯤에서 이미 딱딱해지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여기보시고 웃어보세요” 라고 외쳐도 사진 찍히는 것에 자연스럽지 않은 엄마의 표정을 잘 잡아내기란 무리였다. 더군다나 셀프카메라로 찍을땐 치즈도 김치도 도움이 되질 못했다.







이때 우스갯소리를 도맡아 하는 넷째가 ‘엄마, 이렇게 따라 해보세요. 개구리 뒷다리~’ 깜짝 제안을 했다. ‘김치이~’ 에서도 ‘치즈~’ 하면서도 입만 벌릴뿐 표정은 영 딱딱했던 엄마가 ‘개구리 뒷다리!’에서 활짝 웃는 표정으로 살아났다. 개구리가 보양식이라고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개구리 몸통도 아닌 ‘뒷다리’가 이렇게 제대로 약발이 있다는 것에 우리 모두 놀랄만큼 사진 찍을 때마다 모두가 개구리 뒷다리 합창을 했으니 지나는 사람들 까지도 웃게 만들었다. 재미를 붙인 엄마는 두 손으로 V자도 연신 그리면서 개구리 뒷다리를 지치지 않고 웃어가면서 연발하고 있었다.






▲ 사진 찍을때 마다 재미와 생동감있는 표정을 준 일등 공신은 뭐니뭐니 해도 '개구리 뒷~다아~리'





장작불이 사그라들자 모두 실내로 들어갔다. 뒷치닥거리를 위해 몇몇이 남았다. 고기를 활활 굽던 뜨거운 불꽃은 보이지 않았다. 허연 재만이 솜털처럼 보숭보숭 감싸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따뜻했다. 두 팔을 뻗고서 호호 불어 제낄 때마다 불씨는 금방 살아올랐고 불꽃이 보였다. 마치 언제 내가 시들시들 하기라도 했냐 싶을 정도로. 뇌기능 인지장애를 겪던 엄마가 '치매’로 불리던 때는 분명 저렇듯 하얀 재를 뒤집어 씌어져 있었던 상태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불이 다 꺼졌다고 믿었지만 입김을 불어 넣을때마다 살아나던 재속의 불꽃처럼 현재의 엄마는 자식들의 애정과 손길이 수시로 닿을 때 마다 조금씩 회복한 모습이 저 불꽃과 다름없이 닮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온 가족이 서로 앞다투어 엄마랑 사진을 찍겠다고 옆구리를 파고드는 모습들, 귀챦다하시면서도 뭐하러 자꾸 찍냐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포즈를 잡던 모습. 그날 우리가 기대했던 일몰(日沒)은 없었다. 구름이 짙게 드리워져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을뿐더러 설사 낙조가 눈물나게 멋있었다해도 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섯 남매로부터 플래시세레를 받느라 정신없었던 그 순간만큼은 당신의 인생에서의 석양이나 일몰은 잠시 잊었을테니까.


 






저녁을 먹고 자정이 될 때 까지 남자 여자로 나눠서 진행된 윷놀이를 하는 동안 힘없고 혼란스럽던 팔순노모는 그 자리에 없었고 윷놀이에 몰입한 활기 넘친 모습의 엄마만 있었다. 도, 개, 걸, 모를 일일이 짚어가며 말을 쓰는 것도 엄마였고 잘못된 방향을 잡아내기도 했으며 여자들이 이길 때마다 들어오는 수입도 짭짤히 챙기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 이른 아침 땅에 내린 서리가 곱다.





다음날 아침, 모두가 카메라 셧터를 누를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밖에서는 ‘그만 나오세요~’라는 러브콜이 이어지고 휙휙 하니 쇳소리 나는 휘파람을 신나게 불어제끼고 있었다. 엄마의 한복 매무새를 보고 있던 내게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 놓으셨다. “이게 얼마인지 좀 세어봐라” “웬 돈?” 지폐가 뭉툭하니 잡혔다. “이거 뭐하시려구?” “애들 줄라고~ 이따가 부르면 가지고 나와라이”






의치도 끼고 한복의 매무새를 다시 고친 엄마에게 분홍빛 연지를 발라 드렸다. 손거울을 여러번 들었다 놨다를 하시면서 여러차레 물으셨다. “괜챦냐, 너무 진하지 않겄냐”라며 화장지로 입술을 거듭 찍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신부 대기실 풍경과 이 상황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엄마, 나갈까요. 아무렴 새색시가 이보담 이쁠까.”






발그래해진 엄마는 지팡이 대신 내 손을 꼭 쥔 채 조심조심 방을 나와 열 발자국 정도를 떼었다. 잘못하다가 치맛자락이 밟혀 넘어질세라 웨딩드레스를 거드는 사람마냥 살포시 들기도 했다. 거대한 대형 TV스크린을 배경으로 의자에 모처럼 꼿꼿이 등을 세우고 앉은 엄마는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장남이 이 자리에 모이게 된 동기와 그간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어서 이어진 말씀이 있었다. 자식들 손주들 앞 임에도 헐리웃 스타처럼 다소 흥분된 모습으로 마치 관공서의 장이 신년사를 읽듯이 “내가 말재주가 없는데 ~”라며 서두를 시작했다. “우리 아들 딸 들, 며느리들 사위들 손주 손녀들. 다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다.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들을 했냐 …… 미안하고 고맙다. 내가 이만한것 다 너희들 덕분이다. 내게 언제 또 이런 자리가 있겠냐. 모쪼록 니들이 서로 돕고 아끼면서 우애를 나누고 엄마가 없어도 화목하길 바란다.엄마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






숙연해지는 분위기를 깨기 위해 “아 기다리 고 기다리 던 선물 증정 순서”라는 말에 무거울뻔 했던 공기가 일순 가벼워졌다. 겨울철 따뜻하게 신으시라고 털 부츠도 나오고, 뭐니뭐니해도 돈이 최고의 선물이라며 봉투들을 안겨 드리기도 했다. 복지관 다니실때 춥지 말라고 밍크 코트에 어울릴 예쁜 귀마개도 씌어드리고, 혈압과 당뇨에 최고라는 보조 식품도 안겨드렸다. 두 손을 꼭 잡아 드리기도 하고, 볼을 부벼 드리기도 하고, 안아 드리기도 했다.


 








활짝 핀 얼굴에서는 ‘수줍은 아이고’와 ‘감탄의 세상에~’가 번갈아 터져 나왔다. 엄마에게 최고이자 최대의 표현은 ‘아이고, 세상에’ 단 두개로 압축되는데 기쁠때나, 슬플때, 속상할때나, 심지어 화가 날 때 조차도 이 두 단어의 길고 짧은 호흡만으로 그 경중(輕重)이 느껴질 정도로 함축된 표현을 쓰곤 하셨다. 전날밤이 ‘개구리 뒷~다~리’로 풍성했다면 다음날 아침은 한마디로 ‘아이고!’ 였다고나 할까. 두고두고 오랫동안 생각날 장면이다.






아무도 절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큰 절을 했다. (언제 또 이런 날이 있을지......) 숙인 고개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뭐라고 말로 형언하기 힘든 복잡미묘한 심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행여 자칫 분위기가 무거워질세라 애써 식구들에게 등을 돌리고서 엄마에게 다가가 쓰잘데없이 저고리며 고름이며를 자꾸 매만져 드리고 있었다.







그때 귀엣말로 “아따, 옷은 그만 좀 만지작거리고 아까, 그것 있쟈”라며 고개로 신호를 보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눈물을 훔치고 갠 얼굴로 봉투를 들고 나왔다. “앞으로 말이다. 은행일, 금융권에 관해서는 야 하고 상의를 하면 좋겠다”는 말에 모두가 눈이 커졌다. 당신의 예금통장을 막내딸에게 관리 시킨다는 말을 공식적으로 오해없도록 하시겠다고 한 것이 이렇게 나와버렸다. 애매모호한 문구 덕분에 잠시동안 모두가 행복한 착각(錯覺)에 빠졌다. 왜냐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을때 마다 엄마에게 찾아오라’는 말로 모두가 이해를 했기 때문에. 미안하게도 꿈은 빨리 깨는게 좋겠다 싶어 찬물을 끼얹어야 했다. “엄마에게 보내는 날짜들 모두 잘 지켜줄것. 알았지! 내가 자주 확인 해 볼테니까.”





“자 하나씩 이리 나와라.니들 줄라고 새돈으로 바꿨다”시며 “부자는 아니니까 요만큼 씩만 준다이” 라시며 하나씩 불러내어 손이 베일 정도로 빳빳한 배춧잎을 두장씩 쥐어주셨다. “택시타고 가라”는 후렴구도 잊지 않으셨다. 그러고보니 모임 전전날 심각한 표정으로 “모임할때 말이다. 통장 헐어서 얼마씩 나눠줘야 하는거냐?”라는 질문에 “아니, 엄마가 모든 비용을 내시는데 그걸로 충분하지. 꼭, 잘 가지고 계세요.” 아마도 그 말에 시름을 덜으셨는지 그런 깜짝 이벤트를 하신게 아니었나 싶다.








▲ 가족들과 함께한 한 1박 2일 외에도 막내사위와 함께 한 강화 여행. 언제든지 좌 청룡 우백호처럼 양 손을 힘있게 잡아드릴 수 만 있다면 어디고 언제까지든 가실 수 있을것만 같은데......!





한참을 웃고난 다음에 이어진 순서는 그날 모임의 하이라이트였다. 병원에 들고나면서 주야로 애쓴 막내 며느리에게는 소원이던 ‘드럼 세탁기’ 크레딧을, 급할 때마다 부르면 냉큼 달려와주던 큰 딸에게는 맛있는 잡곡밥 먹으면서 ‘건강하길 바란다’는 멘트와 함께 ‘최고 성능의 압력밥솥’을 선물하는 것으로 그간의 공을 돌려서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했다.


 

 







돌아오던 날 추억이 한 보따리였는데 두개 보너스로 얹혀진 게 있다. 엄마가 보고 싶어하던 북한땅이 바라다 보이는 전망대에 갔다온 것과 렌트한 대형 차량이 서버리는 바람에 두어시간 예정을 빗나간 차질도 겪기도 했지만 덕분에 추억 굳히기처럼 잊지못할 장식이 되었다.





 





강화에서 우리가 보낸 1박 2일은 어떻게 지냈나 싶을 정도로 정신없이 지나갔다. 조촐하고 소박했지만 잔잔한 재미와 감동이 있었던 ‘개구리 뒷~다~리’ 덕분에 엄마의 함박웃음을 원없이 보았던 풍성했던 시간이었다. ‘빳빳한 배춧잎 두 장’ 까지 얹혀져 신선한 추억(追憶)으로 남겨졌다. 모두가 제 자리로 뿔뿔이 흩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곰곰 생각해보았다. 강화에서의 일몰은 없었지만 아침 산책길에 마주한 서해바다에서 본 일출(日出)은 무엇이었을까? 생명의 경외감과 에너지로 충만하게 떠오르던 해를 보면서 상서로운 징조로 여겨졌다. 왜냐면 ‘엄마의 일출’과 다름없이 느껴졌으므로.







▲ 강화의 바닷가에서 일몰은 없었다. 대신 예상 밖의 눈부신 일출이 있었다. 복(福)이 있었음이다.







훗날, 언젠가 일몰을 맞아야 할 때가 오면 ‘온전 전, 있을 재, 복 복./온전한 복이 있을지니!’ 라는 이름처럼 축복받은 일몰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 할 뿐이다. 뉴욕으로 돌아온 뒤 가끔 1박2일을 습관처럼 되뇌어 보곤 한다. 누가보면 TV 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주인공 한 사람에게 모든 비용을 쓰도록 만든 일명 ‘독박’을 쓰게 만든 그런 몰염치한 그런 1박 2일로 비치지는 않았을지 말이다.






Mom! You did a Good Job. ^_______^b













▲ 제목/ A Woman Figure Croquis. 2012. 종이에 물감과 연필. 설명/ 왼 팔을 위로 쭉 뻗어올려 팔과 다리를 쭉 펴주는 자세이다. 어쩌면 우리가족이 보낸 1박2일은 긴장을 풀어주면서 서로에게 넣는 추임새 같은 것은 아니었을지..... 스트레칭 하는 모델의 몸을 통해서 일출에서 얻던 기운도 이와 같았다고 한다면 과장으로 들릴런지 모르겠다.


kimchikimny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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