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눈망울이 무던히도 순하게 보였다. ‘눈’이 어쩜 저렇게나 클까? 그리고 속눈썹은 어쩜 그리도 가지런하고 긴지 여간 매력적이지 않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던가. 눈을 통해서 사람이든 동물이든 마음이 전달되기는 마찬가지여서 처음 보는 말을 대하면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참을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눈뿐이 아니었다. 윤기 흐르는 갈색의 모질, 야생의 갈기 그리고 육중한 긴 다리…. 말의 이모저모를 훑으면서 나는 눈을 마주치려고 여간 애를 써 보았지만 말은 수줍음을 타는지 자꾸만 눈을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낯을 가려서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에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갔고 고개를 정면으로 내밀고 눈을 맞추려는데 그만 말이 ‘히히힝~’ 소리를 내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 경매에 나가는 말들의 대기장
이 광경을 저만치서 본 한 할아버지가 황급히 다가와서는 말의 목을 쓰다듬으면서 마치 아이에게 말을 건네듯이 ‘자 자, 놀래지마라. 우리 ‘마리’ 착하지. 여기는 내 친구야. 괜찮다 괜찮아’ 를 연발했다.
자신을 로이(Roy) 라고 소개한 대략 칠순은 되어 보이는 이 할아버지는 뉴욕 주 북쪽에 살고 있으며 개인적인 사정으로 더 이상 말을 키울 수 없게 되어 키우던 말 2 마리를 데리고 말 경매에 오게 된 저간 사정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런데 왜 굳이 하루 종일 운전을 해서 이 멀고 먼 펜실바니아 남부까지 왔느냐 물으니 단 한가지 이유 ‘마리의 고향’ 이기 때문이라서 오게 되었다고 했다.
▲ 흰 갈기의 엷은 갈색의 암말이 '마리' 그 옆에 있는 젖소처럼 얼룩무늬의 숫말은 한살박이로 '프랭크'
‘마리(Marie)’의 본명은 ‘마리 앙트와네트’. 암말로 14세기 명성을 떨치던 프랑스 여왕의 이름을 땄으며 체중은 약 2000 파운드, 나이는 14살이라고 했다. 순한 성격으로 자신을 도와 14년간 농장 일을 충직하게 거들어준 든든한 친구라고 소개했다. 다만, 낯선 사람을 유독 경계하는 편이어서 가까이 다가갈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며 조심해야 할 사항을 이렇게 일러주었다.
‘말을 놀래키지 말것, 말에게 다가가고 있음을 먼저 말(言)로 알릴 것, 큰소리를 내거나 갑작스런 행동을 취하지 말 것, 정면이 아닌 비스듬히 비껴서 대할것, 말(馬)과 눈을 똑바로 맞추지 말것, 말의 목이나 어깨 부분을 만질 때는 결을 따라서 만질것, 코 끝은 건드리지 말 것, 꼬리가 있는 쪽에 있으면 뒷 발로 차일 수 있으므로 뒤에는 서지 말 것 등을 당부 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웃을 때 이를 드러내지 말고 웃으라’는 특별 주문도 잊지 않았다.
처음엔 농담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말의 정면에서 사람이 이가 다 드러나는 행동을 보게 되면 말은 그것을 ‘자신을 공격 하려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말에 관한 이야기들을 牧夫(목부) 할아버지로 실감나게 들으니 말이란 동물이 얼마나 섬세한지 새삼 배우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말과의 인연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 말이 끄는 덜커덕 거리는 수레도 보았고 동네 친구들과 수레 뒷 편에 타고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흔들거리며 新作路(신작로)를 따라 가던 일, 외삼촌을 따라 승마장에 가서 멋도 모르고 말 등에 잠깐 올라탔다가 말이 그만 놀라 내빼는 바람에 떨어졌던 일, 몽골 유목민들과 어울려 한 시간 정도 호기롭게 말을 탄 뒤 며칠간 걷지를 못했던 일... 안장 없이 말을 탄다는 게 얼마나 무모하고 후유증이 큰지 무지해서 괴로웠던 경험과 즐거웠던 경험들이 오버랩 되었다.
뉴욕에 살면서는 센트럴 파크를 거니는 관광객용 마차를 끄는 말들을 늘 보고 퍼레이드가 있을때는 선두에 서는 騎馬隊(기마대) 행렬을 보았으며 도심 안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잘 빠진 말을 여유롭게 타고 순찰을 도는 멋진 뉴욕 경찰들을 봐서 그런지 말이란 동물이 한층 친근하게 다가온 것은 사실이지만 로이 할아버지를 통해서 비로소 주의사항이 많은 동물임을 ‘마리’를 통해서 처음 배운 셈이다.
펜실바니아 주에서 뉴욕으로 돌아온 지 한 1, 2 주 지나서였나? 맨해튼 다운타운의 길을 바삐 가고 있는데 사무실 이삿짐을 싣고 떠난 트럭이 내는 먼지와 함께 바람에 너덜너덜 떨어진 누렇게 빛이 바랜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지나칠 일이었지만 그것을 집어 든 이유는 잡지 속의 사진이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 1960 년대 말경 나온 TV 프로그램 안내지
토크쇼의 달인이었던 쟈니 카슨(Johnny Carson), 침팬지, 드라큘라 그리고 왕년의 스타였던 새미 데이비스(Sammy Davis)의 얼굴이 잡지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아무리 훑어봐도 내용은 별 것이 없었다. TV프로그램을 소개하는 내용이 전부였는데 뜬금없이 네 장의 독특한 사진을 집어넣은 이유는 아마도 잡지를 편집하는 사람의 재치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사진이지만 자세히 보니 그들의 독특한 얼굴이며 웃는 모습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도 남음이 있었다. 네 장의 사진에서 공통점이 한가지 있었는데 모두가 입이 크고 크게 벌리고 있었다, 웃는 모습이기도 하고 평상시 모습이기도 하고 침팬지 같은 경우는 두렵거나 화가 났을 때 보이는 모습이었음에도 하나같이 입을 아주 크게 벌리고 있어서 치아가 아주 두드러져 보였다.
이 사진을 가지고 가서 ‘마리’ 코 앞에 보여준다면 아마도 그 자리에서 발길질을 보기 좋게 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미친듯이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 순간에서조차 로이 할아버지의 주의사항 마지막 항목이 귀에 쟁쟁해서 얼른 입을 손으로 가리고 터지는 웃음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 보냈다.
競買(경매)가 있던 날 로이 할아버지는 마리의 나이가 많아 어쩌면 $1,000 이상의 가격을 받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는데 무난히 좋은 값에 팔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갔는지 궁금해진다.
그러나 저러나 ‘마리’도 14년 만에 돌아간 고향에서 좋은 농장을 만나 잘 들어갔을까. 아무쪼록 예쁜 이름인 ‘마리’ 그대로 불러주면서 ‘짚과 당근 그리고 사과’를 맘껏 먹을 수 있게 해 줄 마음씨 좋은 새 주인을 만나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램 가득하다.
‘마리 앙트와네트 만세!’
▲ 제목 / Marie's Portrait /종이에 수채물감 2010 우연하게도 '마리'와 같은 이름을 가진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온 모델. 눈의 느낌은 다르지만 뭔지 모르게 닮은듯한 느낌이 든다.
김치김 kimchikimnyc@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