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저래 소문이 나서 그런지 더러 여행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대부분은 일정과 좋았던 숙소 등에 대해서인데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하여 모든 정보를 얻어도 최근에 직접 가보고 온 사람의 말에 무게를 싣게 되는 것은 진솔한 경험을 전해 들을 수 있어서이다. 지인 몇이 서부여행을 하려고 한다면서 시애틀과 밴쿠버에 관해서 물어왔다.
▲기내창의 성에가 아름답다. 기내에 있는것을 실감나게 하는 풍경이다.
다른 때 같으면 최대한 나의 경험을 떠올려 뭔가 실질적인 도움이 되려고 애를 썼겠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여행은 모르고 가는 것도 재미가 있지 않을까? 나이도 웬만큼 있으니..... 다만, 숙소 찾으면서는 다른 것에서 절약할 생각하고 좀 좋은 곳에서 머물면 좋겠다. 내가 전에 가서 좀 고생을 해서 말이야..”
▲기내창을 통해 바라본 바깥 풍경 지난 첫 해외여행 추억들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났다.
지난 여름 정해진 기간 내에 쓰지 않으면 허공으로 날아가는 비행기표가 있어서 혼자 국내 여행을 했다. 오지랖 탓에 웬만한 곳은 다 간 것 같은데 시애틀엔 아직 못 가봤음을 떠올리고 그곳을 목적지로 정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최대한 멀리 비행을 하고 싶어서 고른게 시애틀이었다.
무엇보다 톰 행크스와 멕 라이언이 주인공으로 나온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영화가 왠지 나를 그곳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추상적이지만 뭔지 모르게 시애틀에서는 즐겁고 편안한 그림이 연상되었다.
▲가랑비 내리는 시탁 공항. 미국 원주민인 얼굴이 기체에 크게 그려져있는 알래스카 항공기들이 보인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난 지금 그 제목만 떠올려도 따끈한 러브스토리는 온데간데 없고 악몽(惡夢) 같았던 불쾌한 기억 몇 가지만 남아있다.
하필 그 영화제목이 내가 시애틀에서 겪은 상황을 압축(壓縮)해서 표현하는 것 같고 끔찍했던 경험을 패러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에버그린 주 답게 상록수가 참 많은것이 인상깊었던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외곽 풍경
뉴욕의 JFK공항을 이륙하여 시애틀의 시탁(sea-tac)공항에 미끄러지듯 비행기가 착륙을 하고, 쾌속전철 속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상록수 풍경을 보면서 대한 시애틀은 묘하게도 20년 전 혼자 첫 해외여행을 시작했던 파리와 비슷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스타벅스 커피가 시작된 시애틀이어서 그런가? 정말 커피 전문점이 블럭마다 있는것 같다.
▲길 바닥에도 커피 콩이 구리로 상감이 되어있다. 커피를 마시려면 이 사인을 따라가면 된다는 뜻.
낯선 외국 땅 그것도 생판 모르는 각국의 여행자들과 첫 밤을 같이 보내게 되었다. 첫 기착지에서의 첫날 밤은 생경함, 설레임, 흥분 그리고 두려움이 동시에 겹쳐졌는데 오래 전의 빛 바랬을 법도 한 추억이 비좁고 불편한 워싱턴 주 시애틀의 한 숙소에서 떠올랐다.
그때도 그랬다. 밤 늦게 들어온 여행자들로 해서 자정이 넘도록 문 여닫는 소리에, 그 좁디 좁은 곳에서 그것도 8명씩이나 한방을 써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예약하기가 별 따기 만큼이나 힘들었던 터라 그마저도 다행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전날 뉴욕에서 잠을 설친데다가 새벽부터 부산을 떨고 나오느라 가뜩이나 피곤했지만 코 앞의 여행자가 밤 늦도록 짐꾸리는 소리에 쉬이 잠이 들지 못했다. 새벽 2시가 가까워올 즈음엔 세상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죽음 같은 잠에 빠졌던 것 같다.
두세 시간 잤을까? 더듬더듬 가까스로 침대 머리 맡의 등(燈)을 켰다. 목이며 어깨며 다리며 온 몸이 가려워서 긁다가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반. 손톱에 피가 묻어 있었다. ‘잠결에 얼마나 긁었기에….이게 무슨 일이지?’ 황급히 화장실로 가서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을 제외한 목부터 시작하여 사방 군데가 붉은 동전 만하게 툭툭 붉어져 있었다. 그냥 부은 정도가 아니고 마치 경주의 고분(古墳) 군 형상처럼 장난 아니게 부어, 모르는 이가 보면 무슨 큰 피부병이 생긴 것으로 오해 받을 정도였다.
아, 정말이지 그 밤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
가려움이 심하면 고통스러운 지경에 까지 이르는데 그때 상황이 딱 그랬다. 너무 가려워서 새벽 5시 상황에 찬물 목욕을 했지만 가려움증을 덜어주진 못했다. 물린 곳이 수십여 곳 참으로 가관이었다.
보기가 너무 흉하여 민소매를 입을 계절에 목도리 까지 둘르고 있어야 했다. 카운터로 내려가서 비상처방, 그래 봤자 한국식으로 물파스나 연고 같은 것이라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냉담하게도 ‘매니저 출근하거든 물어보라’는 게 전부였다.
매니저가 출근을 했다. 30대 중반의 백인여성 이었다. “안녕하세요. 어젯밤 들어왔는데 잠든지 세시간여 만에 이렇게 물렸는데 이게 뭔가요?” “글쎄요. 모기 아닐까요?” “모기라고 생각했는데 모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호스텔에 이런 증상을 겪은 여행자가 전에 있었나요?” 물으며 옷 바깥으로 드러난 목과 어깨 다리 등을 보여 주었다.
너무 많이 물려 부은 정도가 심상치 않고 일렬로 줄지어 물린 이상한 모양이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어렴풋이 들었던 베드버그(빈대) 라는 해충이 떠올라 그런게 있느냐 물으니 대답이 천연덕스럽게 ‘나는 모르겠다’ 였다.
그러면서 한마디 말을 보탰다. "그게 만약 베드버그 였다면 그것은 밖에서 옮아 올 수 있습니다. 어디 있다 왔는지(It depends where you are)에 따라 다르겠죠.” 괜히 호스텔에 뒤집어 씌우지 말고 여행자인 당신이(나) 어디에 있다 왔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이었다.
“어제 집에서 출발해서 왔는데요.” 라는 대답에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집이 어디신데요?” “뉴욕인데요.” “그럼, 비행기를 타고 오지 않았나요?”
매니저는 내가 간밤에 물린 책임을 내가 이전에 머물다 온 곳으로 전가시키려다 뉴욕에서 왔다니까 ‘애꿎은 비행기 좌석’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었다. 얕은 수에 기가 막혔다.
“아니요. 이 호스텔에 뭔가가 있습니다. 베드버그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해충이 있는게 분명하니 방을 바꿔 주세요” 했더니 예약한 일정을 취소하고 나간다면 모르지만 방이나 침대조차 바꿔줄 수 없다며 대신 특별히 소독을 하라고 지시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긴 세계 각국 여행자가 드나드는 곳’ 이라는 묘한 뉘앙스의 말로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나는 본래 어디서든 모기에 잘 물린다. 누구보다도 빨리 물리고 많이 물린다. 그러나 이제껏 모기에 물렸어도 그렇듯 고통스럽게 가렵고, 부어 오르진 않았다. 게다가 뻘겋게 부어 오른 윗 부분에 물린 자국으로 보이는 구멍이 선명하게 나있었다.
그 날 아침 몇 사람이 내가 매니저와 나누는 대화를 들었는지 ‘와서 보자’고 했다. 그는 그 호스텔에 장기 체류하며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베드버그가 있는 것으로 안다”며 청소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물어보라고 귀띔해 주었다.
여행자가 모두 방을 비운 그날 내가 잤던 방엔 ‘출입엄금’이라는 표시가 붙고 ‘특별소독’이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그날 밤 청소를 마친 이들에게 부위를 보여주며 “이게 뭐냐?” 물으니 두 사람이 교환하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주위를 살피면서 “네, 베드버그 맞아요. 몇 달 전 청소하다 물렸는데 아직도 흉터가 남아있다”며 피부색이 거무스레해진 물린 곳을 보여주었다.
내가 잤던 침대에서는 빈대의 알들이 무더기 발견 되었다. 즉, 내가 밖에서 묻혀 가져온 것이 아님을 증거로 보이니 숙소 매니저의 파렴치(破廉恥)한 거짓말이 드러났다. 둘째 날 밤, 소독을 했더라도 도저히 그 방에선 못 자겠으니 바꿔달라고 요구했으나 방이 없어서 옮겨줄 수 없다며 빈대에서 물렸던 침대 옆으로 자리이동만 했다.
바르는 연고와 스프레이를 내민 것이 그들이 한 성의의 전부였다. 그날 밤 숙박비는 내가 강력하게 환불 해 달라고 요구해서야 이루어졌다.
▲베드 버그에 무자비 하게 물린 숙소에서 그물망 바깥의 시애틀의 명소'마켓 플레이스'
이십여 년이 넘는 동안 국내 국외 그 어디를 다니며 아무리 험하고 지저분하고 값 싼 숙소를 다녔어도 빈대에 물린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다. 벌레에 물려서 불쾌했지만 그 매니저와 숙소 직원들의 모르쇠로 행동하던 것과 뻔뻔한 거짓말이 더 오래도록 불쾌하게 남았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절묘한 제목은 뉴욕의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됐다. 그 가려움과 통증으로 한번도 깊은 잠이나 단잠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잠을 못 이루게 한건 빈대만이 아니었다. 빈대로 인해 계획된 모든 일정이 어그러진 날 이것저것 너무 열 받아서 그랬던지 치약을 짠 것이 하필 빈대 물린데 바르는 연고였다. 아무리 이를 닦아도 거품이 생기지 않는 게 입안에 돌던 기름기가 이상하여 보니 치약과 색깔이며 모양이 똑같아 보이던 그 연고로 이를 닦았으니 원~
▲여행용 치약과 벌레 물린데 바르는 연고와는 크기나 디자인이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아 결국 연고를 칫솔에 쭉 짜서 이를 닦는 기가막힌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후 속이 뒤집혀서 이 닦기만 내리 5회에 입을 씻어내는 차원에서 2리터의 물을 마셨다.
아무리 화가 나고 열을 받는 일이 생겨도 침착해야 한다는 것을 불면의 시애틀에서 얻은 교훈이라면 말이 될까?
▲제목. 복잡다단한 이미지. 2010. 종이에 크레용. 시애틀에 머무는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던그 복잡다단했던 심정을 복잡하게 겹쳐 혼선을 빚는 선들을 통해서 다시 읽어본다.
참고로 빈대가 무엇인지 모르는 분들은 아래 내용을 참조해 주기 바란다.
베드 버그(BED BUG). 빈대과 해충으로 몸길이 5mm 미만이며 둥글 납작한 형태의 갈색을 띄고 있다. 암컷이 하루에 5개 가량의 알을 낳으며 4주면 다 자라며 특유의 악취를 풍기며 밤에 활동하고 사람 몸의 피를 팔아 기생하는 해충으로 아시아 남부가 원산이나 온 세계에 퍼져있다. 길게는 6개월 피를 빨지 않아도 생존할 만큼 무시무시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주로 목재, 침대, 이불, 옷, 등 살며 사람을 따라 이동한다고 한다. 영하 섭씨 10도 이하이거나 100도 이상의 온도에서만 죽는 이 해충은 1940년경에 창궐했다가 사라지는 듯 싶었는데 1995년 이후 그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으며 그 진원지가 미국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