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 3월31일, PM 11:41:02 파리 : 4월01일, AM 06:41:02 서울 : 4월01일, PM 01:41:02   시작페이지로 설정 즐겨찾기 추가하기
 
 
 
꼬리뉴스 l 뉴욕필진 l 미국필진 l 한국필진 l 세계필진 l 사진필진 l Kor-Eng    
 
뉴욕필진
·Obi Lee's NYHOTPOINT (103)
·강우성의 오!필승코리아 (40)
·김경락의 한반도중립화 (14)
·김기화의 Shall we dance (16)
·김성아의 NY 다이어리 (16)
·김은주의 마음의 편지 (45)
·김치김의 그림이 있는 풍경 (107)
·등촌의 사랑방이야기 (173)
·로창현의 뉴욕 편지 (496)
·마라토너 에반엄마 (5)
·백영현의 아리랑별곡 (26)
·부산갈매기 뉴욕을 날다 (9)
·서영민의 재미있는인류학 (42)
·신기장의 세상사는 이야기 (17)
·신재영의 쓴소리 단소리 (13)
·안치용의 시크릿오브코리아 (38)
·앤드류 임의 뒷골목 뉴욕 (37)
·제이V.배의 코리안데이 (22)
·조성모의 Along the Road (50)
·차주범의 ‘We are America (36)
·최윤희의 미국속의 한국인 (15)
·폴김의 한민족 참역사 (406)
·한동신의 사람이 있었네 (37)
·황길재의 길에서 본 세상 (244)
·훈이네의 미국살이 (115)
·韓泰格의 架橋세상 (96)
김경락의 한반도중립화
박정희 유신독재가 노골화한 70년대초 도시산업선교활동을 하며 반독재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투옥돼 고초를 겪었다. 도미후에도 민초들을 위한 목회의 길을 걸으며 밝은한인사회캠페인과 남북평화통일을 위한 한반도중립화통일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뉴욕흥사단 회장 역임, 한반도중립화통일운동본부 상임대표. 2012년 CMP 선정 올해의 아시안자원봉사상 수상.
총 게시물 14건, 최근 0 건 안내 글쓰기
이전글  다음글  목록 수정 삭제 글쓰기

제국주의자를 믿지 말라

글쓴이 : 김경락 날짜 : 2014-01-09 (목) 14:54:32

 

 

제국주의(帝國主義-Imperialism)는 무엇인가? 기회와 국력이 허용하는 한 국가와 영토와 권력범위의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주의이다. 사자나 힘센 맹수들이 같은 동물인 힘이 약한 동물을 잡아 먹는 동물적주의가 제국주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이 없으면 힘을 길러야만 한다.

 

안창호는 일찌기 16세 소년 때 청일전쟁(1894-95)이 일어났는데, 평양에서 일본군과 청나라군이 전쟁하는 것을 보고 그는 의아한 생각을 가졌다. "일본과 청국이 싸우면 싸웠지 왜 한국 땅에 와서 싸우는가?"

 

여기서 소년 도산은 한가지 결론을 얻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다. 타국이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와서 싸움을 벌이는 것은 우리나라에 힘이 없는 까닭이다. 힘이 없고 이름만 있는 한국, 그렇다 힘이다. 힘을 기르자, 먼저 힘을 길러야 한다'고 깊이 깨달았다.

 

도산 안창호의 사상은 힘을 기르자는 사상이다. 그렇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평화를 사랑하고 세상 모든 사람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민족정신을 이어받은 우리 대한의 민족은 이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먼저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런데 7500만 민족- 이 작은 민족이 힘을 합해도역부족이거늘 남.북한으로 갈라지고, 남한은 30년 군사독재의 잔당들에 의해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한다고 애꿎은 국민을 종북이니, 좌파니 우파니 이름을 멋대로 부쳐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놓고, 북한은 1인독재체제를 우상화 하면서, 인민이 자신의 의견만 표현해도 처형과 살륙행위를 당연한듯 일삼고 있으니 참으로 약육강식의 동물세계에서 만 볼 수 있는 한심한 일이 동방예의지국이라 자부했던 우리 민족에 일어 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단결하지 못하는 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리떼처럼 달려들어 호시탐탐 우리의 생명을 노리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우국이라고 ‘전략적 동맹관계’를 맺은 미국의 제국주의 근성에 대해서 살펴 보자. 미국 서부 개척과 제국주의 시대(1865~1918년)는 역사적으로 볼 때 19세기 말까지의 미국은 먼로주의로 상징되듯이 세계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비개입(非介入)과 유럽 여러 나라의 간섭 거부라는 고립주의를 취하여 왔으나, 자본주의의 성숙으로 고립주의의 유지가 곤란하게 되어 1890년 이후 외교의 방향을 전환하여 20세기 초까지 개입주의와 고립주의가 병행하였다.

 

 

조선의 대동강에 침입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를 평양 군민(軍民)들이 반격하여 불에 태워버린 사건(제너럴셔먼호 사건, 1866년)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신미양요(1871년)를 일으킨다. 1882년 음력 4월 6일 조선의 전권대신 신헌과 전권부관 김굉집은 미국 전권 대신인 해군제독 로버트 슈펠트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의정(議定)했다.

 

베네수엘라 국경위기 사건(1895~96년)이 발생했을 때 영국과 갈등을 빚은 베네수엘라는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 바람에 미국과 영국이 충돌할 뻔 했으나 이미 국력이 하강 추세에 있던 영국이 한창 국력이 상승 중이던 미국과 충돌할뻔 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과 미국은 화해했다.

 

1898년 미국의 메인 호가 스페인령 쿠바의 아바나 항에서 정박중에 폭발한 사고로 인하여 발생한 미국-스페인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스페인은 쿠바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종전 후 3년 동안 쿠바에서는 미국 군대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으며, 1903년에는 관타나모에 미국 해군의 기지가 설치되고 쿠바의 중추적 기능을 미국자본이 장악하는 등 쿠바는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의 중재를 맡은 미국은 식민지 필리핀의 안전을 일본으로부터 보장받기 위해 같은 해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음으로써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미국과 중화민국은 1911년에 수교하였다. 미국은 국공 내전 시기와 제2차 세계 대전 때, 전(全) 중국의 합법 정부로서 민국정부(民國政府)를 승인하고 지원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1900-1920)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국제연맹의 창설을 제창하고, 주도함 으로써 고립주의를 탈피하려 했으나, 상원이 국제연맹 헌장의 비준을 거부함으로써 다시 신고립주의 시기로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고립주의, 세력균형, 집단 안전보장이라고 하는 3개의 외교노선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 당시 미국인들에게는 세력균형 정책이 유럽의 권력 정치를 연상시켰기 때문에 거부되었으며, 집단 안전보장정책은 새로운 것이기는 했지만 미국인들이 세력균형 정책과 집단 안전보장 정책을 명백히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배척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그들에게 보다 익숙하고 안전하게 보이는 방법으로 고립주의로의 도피를 선택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1939-1945)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1941년의 태평양전쟁으로 미국과 일본은 전쟁상태에 돌입하였고 일본은 이 전쟁에서 동아시아와 서태평양 지역을 4년간 점령하였다. 1945년 5월 초 독일의 항복 이후 대일전에 총력을 기울인 미국은 당시 일본 내에 "본토 결전"을 외치는 소리가 높음을 감안, 전쟁이 보다 오래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소비에트연방군의 참전을 유도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를 단독 점령할 의도를 갖고 있었으나,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핵무기 투하 이후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8월 15일 항복함에 따라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www.ko.wikipedia.org

 

 

 

당시 미국의 모스크바 특사 에드윈 폴리와 소비에트연방 대사 해리먼은 8월 13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소비에트 연방이 한반도에 야심을 갖고 있으니 당장 한반도 전역과 만주를 점령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항복 당시 이미 소비에트연방군은 한반도의 동북부를 폭격하고 있었고, 미군은 필리핀에 위치해 있어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묵살되었다. 결국, 한반도 이남에는 미군이 진주하게 되었으며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패전한 일본에도 미군을 주축으로 한 점령군에 점령되고 미국의 군정 하에 놓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이 고립주의를 버리고 세계정치에 적극 참여하도록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과거의 교훈을 거울삼아 새로운 시대의 지도적 위치를 떠맡아, 국제연합의 창설과 운영을 주도하였다. 미국은 소위 자유진영의 지도자로서 활약하고 있다.

 

 

 

냉전과 흑인 해방 운동 (1945-1964)

 

트루먼의 등장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신봉했던 파시즘의 종식을 전제로 한 미국 외교정책의 전면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트루먼은 반소 감정이 매우 강해, 이미 상원의원 시절에 “독일군들과 소련군들이 피가 다 빠질 때까지 싸웠으면 좋겠다”는 독설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국제주의적인 협상과 타협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자유세계의 방위를 위해선 소련이라는 ‘세계적인 깡패’에 대해 십자군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트루먼 재임시, 미군은 한반도를 38선을 그어 분단시킨 장본인이다. 해방 5일 전인 1945년 8월 10일 밤에 당시 군무성에서 딘 러스크 대령과 본스필드 대령 2명을 시켜 단 30분만에 38선을 그러 분단시킨 것이다. 그리고 38선 이북은 소련에서 가지라고 내어주고, 미군은 남한을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시까지 미군정으로 다스렸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은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리는 선언을 하였다. 이 선언은 이승만을 비롯한 남한의 정치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마침내 미소공동위원회는 아무런 타결 없이 1947년 8월 해산하였다. 미국은 1947년 9월 국제연합 총회에 한국문제 해결을 위탁했다. 소련의 반대로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 되게 된다. 1948년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이 날짜로 미군정은 통치권을 한국 정부에 일임하고 해체되었다.

 

미국은 한국 전쟁(1950년~1953년) 당시 유엔군을 조직하여 대한민국 편에서 참전하여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1년 9월에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과 다시 국교를 정상화하였고 그 해에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조인하였다. 미국은 2차대전 피해국인 한국을 분단 시켜 소련과 나누어 가지는가 하면 패전국인 일본을 독차지 하였다.

 

이제 다시 미국은 미국의 그늘에서 힘을 키운 군국주의 일본을 앞세워 아시아 패권을 장악하려고 제국주의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의 방패막이로 삼아 재무장 시켰다. 이와같이 미국은 일본 중국과 함께 단 한번도 한국을 도운 일이 없다. 고로 그 어느 제국주의 국가들과도 우방국이라고 더 이상 속아서는 결코 안되리라.

 

 

대신 미국이 분단시킨 틈을 타서 안보 보위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압살해 온 남.북한 당국자들은 이제라도 권력야욕을 채우기 위한 소인배적인 어리석음과 실수를 되풀이 할 것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협력하고 돌보아야 할 배달의 한 민족의식과 정신을 되찾아 정치, 경제, 문화 모든 영역을 동원하여 하나됨의 노력을 경주해야 마땅하리라고 믿는 바이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2-02 09:31:01 뉴스로.com에서 이동 됨]

이전글  다음글  목록 수정 삭제 글쓰기
QR CODE

뉴스로를말한다 l 뉴스로 주인되기 l뉴스로회원약관  l광고문의 기사제보 : newsroh@gmail.com l제호 : 뉴스로 l발행인 : 盧昌賢 l편집인 : 盧昌賢
청소년보호책임자 : 閔丙玉 l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기아50133 l창간일 : 2010.06.05. l미국 : 75 Quaker Ave Cornwall NY 12518 / 전화 : 1-914-374-9793
뉴스로 세상의 창을 연다! 칼럼을 읽으면 뉴스가 보인다!
Copyright(c) 2010 www.newsroh.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