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통사(東北通史)를 중심으로- 제1부∼1

논문을 내면서
김육불의 <東北通史(동북통사)>는 비록 역사의 의미인 ‘사(史)’자를 넣어 만든 책이나 자세히 읽고난 소감은 한마디로 역사소설이라 평가한다.
역사학이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학문으로 사실만을 기술해야 하는 것이 윈칙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할 때는 반드시 그 시대를 기록하고 그 시기에 편찬된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의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논증해야 하는데 김육불은 역사학의 기본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먼저 정해놓고 주제와 전혀 관련이 없는 각가지 문헌사료를 전시하듯 나열하여 책을 만들었다.
동양 최초의 사서이자 지리서는 <상서/우공>인데 김육불은 ‘동북지역’을 논하면서 <상서>를 인용하지 않았고 고대사의 기록을 담은 <오월춘추>나 <로사>같은 문헌을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지는 오류로부터 시작한 것으로 위서(僞書)가 되고 말았다.
기원전 2333년 새로운 땅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단군조선)이라 한 단군왕검의 아들, 창해사자 현이(玄夷)인 부루(夫婁)가 우(禹)에게 홍수를 관리하는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가르쳐주어, 우는 홍수를 막는 치수에 성공하고 전국을 구주(九州)로 나누어 하(夏)나라를 세웠다.
우는 북쪽을 상징하는 현이(玄夷)인 주신(州愼: 조선) 부루의 은덕을 잊지못해 정전(井田)과 율도량형(律度量衡)의 제도를 세워 하나라 문명을 열었다. 우가 나누었다는 구주(九州)의 하나가 기주(冀州)이며 기주는 북쪽을 가리키는 산서성과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 일대로 주신(州愼)인 단군조선이 위치한 곳이다.
황하 이남에 있던 왕조들은 황하의 북쪽이란 의미로 하북(河北)이라고 불렀다. 다시말하면 기주지역을 하북이라고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라가 지나가고 주(周)나라 시기에 구주의 위치와 이름이 바뀌면서 기주인 산서성 남부와 하내가 유주(幽州)로 개명되고, 진(秦) 시기에는 산서성 남서부 지역이 요서(遼西)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다.
따라서 기주에서 유주로 유주에서 요서로 같은 곳이 기주, 유주, 요서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서주(西周) 시기 천하의 지도(地圖)를 관리하는 곳인 <주례/직방씨>에, “동북이 유주”라 하여 당시 서부[주]의 도성인 섬서성 호경(서안)에서 동, 서, 남, 북의 방위를 정하여 동북에 해당되는 산서성 남부와 하내를 ‘유주’라고 하였다. →계속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