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평양성의 위치
단군조선의 중심 영토인 산서성 남부에는 진한, 마한, 변한이 있었고 이 지역을 옛날 인도 사람들은 진단(震旦)이라 불렀으며, 진단지역을 확정지을 수 있는 결정적인 천연지형물이 오노산(봉)인데 오늘날의 산서성 남서부에 위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고에서는 더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저서 <동이배달한민족사>(개정증보)(2019), pp.519-525를 참고하기 바란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왕검단군이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한 것은 <삼국유사>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지나의 지리서인 <산해경>에도 단군조선의 도읍지가 평양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단군조선 시기의 평양은 한반도 평안남도의 평양이나 요녕성 요양시의 평양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평양인 임분시, 천연 염지인 북해, 삼한의 도성(都城)이 있던 조양진, 원곡, 임분, 진단의 위치를 나타내는 오노산(봉), 왕검단군의 산인 왕옥산 등의 위치를 지도에 나타내면 다음 <그림 19>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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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연구> - 제58부
나. 왕험성의 위치
조선성(朝鮮城)이 영평부 경내 노룡(盧龍)에 있으며 기자가 봉토로 받은 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문헌사료들은 <日知錄(일지록)>, <大淸一統志(대청일통지)>, <明一統志(명일통지)> 등이다.
“조선은 기자를 봉한 요동의 낙랑이며 지금의 영평부(永平府)의 노룡(盧龍)에 조선성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평부의 위치가 어디인지 추적하기 위해 <明一統志(명일통지)>에 기록된 영주에 대해서 알아보자.
“영평부 건치(建置) 연혁 우공(禹貢)의 기주(冀州) 지역 천문(天文) 연나라의 미(尾) 기(箕) 지역. 처음에 우순이 기주인 동북을 나누어 영주로 삼았는데 이곳이 그 지역이다. 상(商) 시대의 고죽국이고 주(周) 시대에는 유주(幽州)에 속했으며 춘추시대에는 산융(山戎) 비자(肥子)의 두 나라 지역이다.
진(秦) 시기의 요서 우북평 두 군(郡)의 지역이고 한(漢) 말기에 공손도(公孫度)에게 점거되었으며 위(魏) 시기에 노룡군(盧龍郡)으로 고치고 북연(北燕) 때 평주(平州) 및 낙랑군을 설치하였으며 후위(後魏) 때에 낙랑을 고쳐 북평군으로 삼았으며 수(隋) 시기에 평주(平州)로 고쳤다가 후에 주를 폐지하고 군(郡)으로 삼았다.
당(唐) 시기에 다시 평주로 고쳤다가 천보(天寳) 초에 바꾸어 북평군으로 삼았으며 건원(乾元) 초에 다시 평주로 삼았다.
오대(五代) 시기에 당(唐)이 요흥군(遼興軍)으로 삼았다가 금(金) 시기에 승격시켜 남경(南京)으로 삼았으며 천회(天㑹) 초에 다시 평주로 삼아 흥평군(興平軍)으로 승격시켰다.
원(元) 시기에 흥평부(興平府)로 고치고 중통(中統) 초에 승격시켜 평란로(平灤路)로 삼았으며 대덕(大德) 중에 영평로(永平路)로 고쳤으며 본조(本朝) 홍무(洪武) 2년 영평부로 고쳐 북평포정사(北平布政司)로 삼았다.”
고하여 영평부, 평주, 기주, 영주, 노룡군, 고죽국, 유주는 모두 같은 지역을 달리 부르는 이름임을 알 수 있으며 산서성 남서부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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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연구> - 제59부
나. 왕험성의 위치
<畿輔通志(기보통지)>에 영평부(永平府)는 우공의 기주 지역으로 상(은)시대 고죽국이며 유주라고 적고 있다.
“영평부(永平府)는우공(禹貢:2070-1600BC)의기주(冀州)지역으로상(商: 1600-1046BC)시대에는고죽국(孤竹國)이며유주(幽州)지역이되었으며춘추(春秋: 770-403BC) 시대에는 비자국(肥子國)이 되었다.
응소(應邵)는 ‘비자(肥子)가 연(燕)으로 도망하여 연이 이곳에 봉하였다’고 하였다.(한서지리지주) 평주(平州)는 춘추(春秋) 시대에 산융(山戎) 비자(肥子) 두 나라 지역으로(문헌통고) 전국(戰國: 403-221BC) 시대에는 연(燕)에 속하였고 진(秦: 221-206BC) 시기에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두 군(郡)의 경계였으며 한(漢: BC202-220) 시기에 요서군(遼西郡)에 비여현(肥如縣)을 설치하였으며 후한(後漢: 25-220) 및 진(晉: 265-420) 시대에는 이를 따랐다.
후위(後魏: 386-534) 시대에 비여현에 평주(平州) 요서군(遼西郡) 비여(肥如)를 설치하였다.(한서지리지) 평주의 치소는 비여성(肥如城)이다.(위서지형지)”
라고 서술하여 기원전 2,070년부터 534년 사이, 약 2,600년 동안에 걸쳐 같은 지역을 영평부, 평주, 기주, 고죽국, 산융, 비자, 유주, 영주, 연(북연)국, 요서군 등으로 달리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정리하면 <기보통지>도 <명일통지>와 같이 산서성 남서부를 여러 명칭으로 불렸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성을 조선발성(朝鮮發城)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한나라의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주나라 진(秦)나라 시기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무제 원봉3년 길이 트이기 시작했다.
<태평환우기>에 이르길 평주 노룡현에 조선발성이 있다고 하였다. 즉 은나라 기자의 봉지이다. 지금의 평주, 난하, 로현, 노룡현이다”고 하여 조선성을 조선발성이라 했고 노룡에 위치한다고 적고 있다.
노룡의 위치에 대해서 알아보자.
<수경주>에 “유수는 노룡산(盧龍山)에서 나온다. ...연(燕)을 나누어 요서군으로 두었으며 영지에 속한다. <魏土地記(위토지기)>... 비여성 40리에 유수가 있다. 남쪽으로 흘러 고죽성 서쪽을 지나 우측에서 현수(玄水)와 합류한다. 세상에서 소위 말하는 소유수라 하는데 그렇지 않다.”라고 적고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의 기록이다. “흑룡산... 즉 옛 유수이며 오늘날의 난하다. 구양수(歐陽修)가 이르길 난수(난하)가 탄산 동북에서 나온다고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리하면 노룡산, 흑룡산, 탄산은 같은 산으로 유수(난하)의 발원지이며 평주 노룡현으로 흐르는데 이곳에 조선성(조선발성)이 위치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지금까지 내용을 종합하여 고죽국의 영토를 밝히는 유수(난하), 수양산, 그리고 노룡(盧龍)의 위치를 지도상에 표시하면 다음 <그림 20>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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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연구> - 제60부
나. 왕험성의 위치
<그림 20>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산서성 남서부 일대를 영평부라 하고 이 지역을 노룡이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림에 원으로 표시하여 노룡이라 적은 곳은 노룡(새)를 나타낸 것이다.
조선성은 다름 아닌 오늘날의 조양진(朝陽鎭)을 뜻한다. ‘朝’는 조선, 조선성, 조선발성 등의 ‘조’의 흔적이고 ‘陽’은 황하강 물의 위쪽이란 의미이며 ‘鎭’이란 글자는 “지덕으로써 한 지방을 진정하는 명산 대악”이나 “한 지역을 지키는 군사 또는 그 군사의 수장”이란 의미를 갖는 글자이다.
조양진은 황하변에 위치한 지역으로 황하물과 압록수가 합쳐 내려오다가 다시 유수 그리고 현수의 물이 합류하여 흘러내리는 곳으로 물길이 험한 곳이다. 그래서 이곳을 험독(險瀆)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險’이란 ‘험하다’, ‘험준함’, ‘요해처’ 등의 의미를 갖는 글자이고 ‘瀆’은 ‘작은 내의 물을 합쳐 바다로 흐르는 강’ 또는 ‘양자강, 황하, 회수, 제수(패수)’를 의미한다.
험독현은 요동군에 속한 지명이며 험독현에 대해 “응소가 말하기를 조선왕 [위]만의 도읍지라 했다. 물길이 험한 곳에 의지하므로 험독이라 했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을 험독이라 했다. [안]사고는 신찬의 말이 옳다고 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기/조선열전>에 “집해에서 서광이 말하기를 창려(昌黎)에 험독현이 있다. 색은에서 위소가 말하기를 옛읍의 이름이다. 응소가 주석하기를 한서지리지에는 요동군에 험독현이 있는데 조선의 왕이 옛날에 도읍한 곳이다. 또 주석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신찬이 말했다고 한다”라 기록하였다.
서진(265-316)의 학자로만 알려진 신찬(臣瓚)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며, 동진(317-420)의 역사학자 서광(徐廣)은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고 했다.
필자는 서광의 주장을 따른다.
첫째, 단군조선의 중심 강역은 패수의 서쪽이고
둘째, 조선성(왕험성)은 산서성 남서부 영평부의 경내인 노룡에 있었으며,
셋째, 신찬이 역사학자였는지 조차 불명확할 뿐만 아니라 성씨조차도 알 수 없고
넷째, 서광은 역사학자로서 『진기』 46권을 지은 사람이며,
다섯째, 서광은 해(海: 바다)를 황하(黃河)라고 주해한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박식한 역사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황하를 바다라고도 했다는 주석을 남길 수 없다. 그런데 서광의 말이 옳음을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창려현은 한나라의 루현이다. 진(晉)이 후에 해양현이라 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노룡현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창려가 해양이고 루현이며 노룡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검토해본 바와 같이 노룡은 산서성 남서부로 조선성이 있던 당시의 험독임을 알 수 있다. 신찬이 옳다고 한 안사고(顏師古: 581-645)도 틀린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서광의 주장이 옳다고 믿으며, 따라서 산서성 남서부에 위치한 오늘날의 조양진이 험독으로 왕험성(王險城)이라 주장한다. 왕험성은 삼한시 천일(天一)로 태일(太一)인 왕검을 보좌한 우현왕이 거주했던 곳으로 마한의 도읍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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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연구> - 제61부
다. 왕검성의 위치
제4장 1절에서 함께 살펴본 바와 같이 왕검단군의 고향은 단향으로 왕옥산과 패수 사이이며, 왕옥산은 왕검단군이 선도(仙道)를 한 곳으로 단향의 서북쪽에 있는 오늘날의 원곡(垣曲)에 왕검성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패수의 서쪽에 단군조선과 삼한이 위치했고
둘째, <水經注(수경주)/십삼주지>에서 “옛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 서쪽에 있는 조선까지 갔다”라고 하며
셋째, 1천명을 데리고 온 위만은 번조선(변한)의 도읍지인 왕검성을 탈취한 것으로 왕검성은 패수에서 너무 멀지 않아야 하고
넷째, 변한의 왕 41대 기준(箕準: 243-194BC)이 망명온 위만을 박사로 삼고 상하운장(上下雲障)을 맡겨 다스리게 했다는 이유 등이다. 상하운장은 산서성 남부 낙랑 땅에 있던 지역이다.
왕검단군이 조선이란 나라를 세우고 진한, 마한, 변한 삼한으로 하여 마한은 우현왕 변한은 좌현왕으로 삼아 진한의 단군을 보좌하게 하면서 1,048년이란 세월이 지나 제22대 색불루단군 시기(BC1285)부터 진한을 진조선, 마한을 막조선, 변한을 번조선으로 함께 부르면서 각자 독립된 국가로 발전하였다.
기자가 은나라의 감옥에서 단군조선에 망명한 때는 BC1122년 경이다.
변한(번조선)에서 기씨(箕氏)가 왕을 한 것은 변한왕 74대 중 69대인 기후씨(BC390), 70대 기욱씨(BC346), 71대 기석씨(BC321), 72대 기윤씨(BC296), 73대 기비씨, 그리고 74대 기준씨(BC243)로 기자로부터 기후씨까지는 약 730년의 연대차이가 남으로 기자(箕子)가 변한(번조선)의 왕이 된 것이 아니고 기자가 단군조선에 망명한 후 약 730년이 지난 후에 그의 후손으로 보이는 기후씨가 변한의 69대 왕이 된 것이다.
비록 허구이지만 기자조선으로 알려진 조선은 번조선(변한)으로 진조선(진한)이나 막조선(마한)이 아니다. 본고에서는 더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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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