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 소개한 밴더빌트 가문보다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가문은 바로 락크펠러(Rockefeller) 집안일 것이다.
뉴욕 미드 타운에 있는 락크펠러 빌딩은 가장 잘 지어진 현대 건축물(建築物)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1934년 완공이래 뉴욕시의 상징물로 자리한다. NBC 방송국이 위치한 락크펠러 플라자 앞 광장은 매년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으로 전 세계인에게도 익숙한 곳이기도 하다.
▲ 라크펠러 센터 <이하사진=www.en.wikipedia.org>
그러나 이 락크펠러 가문도 밴더빌트 가문에 못지 않게 밑바닥 인생에서 출발을 한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한국에서는 락크펠러를 록펠러라고 표기하고 발음하지만 본 칼럼에서는 실제 발음에 가깝게 표기한다.)
락크펠러 가문을 일으킨 이는 지금도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호(富豪)로 꼽히는 John D. Rockefeller2이다. 뉴욕주 업스테이트의 시골 동네인 Richford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는데 천생이 바람둥이며 힘든 일을 무조건 싫어했던 아버지 William은 가족을 등한시 한 채 평생을 남 등을 쳐먹는 사기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독실한 침례교(浸禮敎) 신자였던 어머니에게 엄한 교육을 받았고 성격도 차분했던 그는 코넬리우스 밴더빌트와 마찬가지로 16세부터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단 막 노동이 아니고 장부 정리를 하는 북 키퍼(Bookkeeper)가 되었다.
▲ 쟌 라크펠러의 열여덟살 모습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과 총명한 지능 덕분에 단번에 직장에서 총애를 받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임금 (3개월에 $50)을 받았는데 이때부터 자신 소득의 1/10을 바치는 11조를 평생 동안 무조건 실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11조가 교회에 하는 헌금이 아니고 교육 사업, 복지 사업, 문화 사업 등 자신이 판단 하건대 미국 나가서 인류의 앞날은 위해 도움이 될 일에 투자를 했다고 한다. 요즈음 재력가 사이에서 유행하는 재산 사회 환원 복지가란 의미의 Philanthropist라는 단어도 실은 주위 사람들이 쟌 락크펠러를 위해 만들어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그는 돈을 벌어들이는 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비즈니스에서 적으로 분류되는 이들에게 추호의 인정도 보여주지 않는 냉혈 인간 혹은 흡혈귀라는 별명도 얻었을 정도로 무자비한 인물이었다.
이 쟌 락크펠러의 축재(蓄財) 도구는 당시로서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등장한 석유 정제 산업으로 Standard Oil of Ohio 라는 기업을 만들었다. 어머니와 가족을 데리고 크리블랜드에 정착한 그는 투자가들을 모아 사업 파트너로 만들고 당시 최고의 화학자들을 리크루트해서 최고의 정제 시설과 기술을 개발했다.
이뿐 아니라 이 휘발류, 경유, 등유, 산업용 석유 등으로 정제된 제품을 가장 싼 가격에 전 미국에 운송하는 철도 항만 시설에도 투자를 하는 등 소위 크게 보는 비전을 제시했는데 그가 일궈낸 석유화학 업체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독점기업으로 분류되어 1911년 34 기업으로 나눠졌다. 이들 업체 중 현재도 유명한 기업들이 즐비한데 ConocoPhillips; Amoco, Chevron; Exxon, Mobil이 모두 락크펠러의 Standard Oil에서 쪼개져 나온 기업이라 하니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사업에는 이토록 잔인하고 철저했던 쟌 락크펠러는 청교도보다 더 청교도 적인 삶을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평생 술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았고 16세때 맹세를 했던 11조를 엄청난 부의 축적이후에도 계속 실행을 했다.
그의 사회 사업 행적(行蹟)을 보면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데 특히 교육 사업에 가장 열성을 쏟았다. 노예제도 폐지에 앞장섰던 아내 Spelman 집안을 기리고자 KKK단이 극성을 부리던 1884 당시 애틀랜타에 흑인들만 다닐 수 있는 Spelman College를 설립했다.
그런가하면 당시 별 볼일 없던 침례교 계통의 대학 University of Chicago에 8천만 달러라는 상상할 수 없는 거금을 기부해서 일약 세계 최고의 대학 서열에 올리는 역할을 했다. 또 1901년 뉴욕에 설립한 Rockefeller Institute for Medical Research (나중에 Rockefeller University로 이름을 개칭)에서는 무려 23명의 Nobel 의학 수상자를 배출했다.
4명의 딸과 외동아들 John Rockefeller Jr (혹은 2세)을 두었는데 자신의 아들에게는 냉혹한 사업 세계에 바로 뛰어들기보다는 자신이 설립한 재단을 관리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주니어의 능력도 아버지 이상으로 비상했던 모양이다.
▲ 쟌 라크펠러와 아들 주니어
비록 재단 관리 이사장으로 평생을 살기는 했지만 아버지가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돈이 되는 모든 사업에 투자를 해서 그 스스로도 모은 재산이 인류 역사상 16번째로 잘사는 (빌 게이츠 보다 더 돈을 번) 인물이 되었다. 특히 주니어는 뉴욕 맨해튼 지역 부동산에 주로 투자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도 조금 과장해서 뉴욕시 아파트 건물의 절반이 락크펠러 가문 소유라고 알려져 있다.
주니어는 브라운 대학 재학시설 칼 막스의 자본론을 읽고 연구하는 클럽의 회장이었다. 친지나 비즈니스 파트너가 훗날 이 전력을 놓고 공산주의자라고 농담하거나 비판을 하면 오히려 받아쳐서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진정으로 돈을 벌고자 한다면 자본론을 읽으라”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가 있다.
주니어는 맨해튼 부동산 투자 이외에 현대 3대 박물관에 하나인 Metropolitan Museum of Art를 설립 전 세계 문화 유산을 모았고 1차 세계 대전 직후 유럽을 방문, 폐허가 된 마을에 교회를 지어주는 대신 잔해를 뉴욕으로 들여와 맨해튼 최북단 클로이스터 박물관 (중세 시대 카톨릭 수도원을 본따 만든 박물관)을 자신의 돈으로 만들기도 했다. 또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현재 전 세계에서 암센터로 가장 유명한 Memorial Sloan-Kettering Cancer Center의 전신 Memorial Hospital도 설립을 했다.
▲ 쟌 라크펠러 주니와와 부인 애비
본인은 유명한 로드 아일랜드 상원의원의 딸과 결혼해서 6 자녀를 두었지만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두 아들 쟌 락크펠러 3세와 넬슨 락크펠러는 뉴욕 주지사로 정치계에서도 성공을 했다. 특히 넬슨 락크펠러는 포드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다.
밴더빌트 집안처럼 미천한 신분 출신이지만 기회의 땅 미국 특히 뉴욕시에서 일가를 이뤄낸 락크펠러는 특히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청교도적인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진정한 부자(富者)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