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강명구 칼럼니스트
어느덧 7월 말이다. 하루하루 피로가 누적되는 상황에서 사막의 무더위 속에서 몇 달을 달리다 보니 이제 기력이 많이 쇠해졌음을 느낀다. 눈을 뜨고 길 위에 나서는 것이 두려워진다. 오늘은 또 어떤 낯선 길에서 이 무더위와 체력의 고갈과 고독을 견디며 앞으로 나갈까? 지금 무위(武威우웨이)를 향해 달리면서 노자의 무위(無爲)를 명상한다.
중국은 신 실크로드의 전략구상인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일환으로 이곳 신장, 간쑤 성 일대의 도로를 선진국 수준으로 잘 포장해놓았다. 도로는 선진국 수준인데 자동차문화가 오래지 않아 운전자들의 수준은 걱정스러울 지경이다. 내가 달리고 있는 312번 국도는 상하이까지 5300km나 뻗어있는 중국의 척추와 같은 도로이다. 그 옆으로 고속도로도 잘 깔려있다. 그런데 고속도로 요금이 비싸니 중국의 화물차들이 거의 이 도로를 이용한다. 중국의 화물차는 그 어느 나라에서 본 화물차보다도 길고 큰 공룡 같다.
이 국도는 아직도 건설 중이어서 중간 중간에 비포장도로로 연결되는데 이런 차들이 그런 길을 한번 지나가면 먼지구름이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의 버섯구름보다도 더 고약하게 일어난다. 내가 이곳에서 뒤집어쓰고 들이마신 먼지는 그 이전에 것을 모두 합해도 모자를 것이다. 중국에는 전기 자전거와 전기오토바이가 많이 보급되어 웬만한 서민들은 이것을 이용한다. 고속도로를 달려야할 화물트럭이 국도의 마을을 지나면서 울려대는 경적소리는 저승사자의 노랫소리보다도 치가 떨릴 지경이다.
달리면서 길 위에서 우주의 원기(元氣)를 받아들여 그 기를 보존하고 신령한 기와 일체가 되도록 하는 정신수양과 몸의 수련을 쌓아 내 스스로 이제는 반 도인이 다되었다고 자부를 하는데도 저 화물트럭과 버스의 경적소리에 치를 떠는 걸 보면 난 도통하기는 애초에 싹수가 노란 것 같다. 오히려 이런 일상에 아무 표정이 없는 중국인들이 다 도인(道人)들 같다. 아마도 이들에게 노자와 장자를 비롯한 훌륭한 스승이 많아서 그런가보다 생각한다. 이런 길 아무데나 트럭을 세워놓고 웃통을 벗고 트럭 밑에 들어가 낮잠을 즐기는 모습은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 바로 저런 거구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창은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고, 방패는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는 모순(矛盾)으로 가득한 나라 중국을 달리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다. 급속하게 자본주의의 길을 난폭운전하며 달리면서도 여전히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 길 어디에나 마을 어디에나 사회주의적인 구호가 어지럽게 난무한다. 세상에서 아름다운 단어는 그곳에 다 붙어있지만 나그네에게는 영혼이 없는 해골처럼 으스스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이곳엔 서구에 대한 열망과 함께 중화주의(中華主義)의 우월감이 기묘하게 공존을 하고 있다.
중국의 길을 달리며 노자의 평화의 길을 생각한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노자는 끊임없이 우리가 가는 길이 길이 아니고, 우리가 아는 그 이름이 옳은 이름이 아니라고 말한다. ‘거기가 길이 아니다’ 내가 달리는 이 길이란 본래 허허벌판이었을 것이다. 그 곳에 말이 달리고 낙타가 지나다니고 언제부터인가 아스팔트 도로를 깔았을 뿐이다. 사물을 이름으로 한정해버리면 더 이상 본래의 그것이 아니다. 본래의 무한한 그것을 한정시켜버리게 된다.
길이 아니라 하니 가는 길을 되돌릴 수 없어도 자꾸 되돌아 생각하게 된다. 더 좋은 길은 없을까? 이 기나긴 여행 중에 누구를 만날지, 무엇을 배울지, 무슨 생각을 할지, 이 여행이 끝나면 무엇을 할지, 또 어떤 사랑을 할지, 나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소년으로 돌아간다. 네가 가는 이 길이 실크로드라 하지말자! 피스로드(Peace road)라고도 하지 말자! 이 길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미래의 소통의 길이 될 것이며, 최고의 여행 노선이 될 것이며, 모험과 사랑을 담아내는 길이 될 것이다. 지금은 그저 최선을 다해 한발 한발 내딛는 일 그것만 하자!
도교와 유교는 중국의 사상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갈래의 물줄기이다. 도교가 카오스(chaos)적이라면 유교는 코스모스(cosmos)적이다. 도교가 예술적인 자유에 관심을 두었다면 유교는 엄격한 사회적 예절과 도덕에 관심을 두었다. 도교가 유연하고 부드러우며 여성적이라면, 유교는 완고하고 강하며 남성적이다. 하나가 민초들의 생각이라면 다른 하나는 지배계층의 논리를 대변한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는 전쟁 없이 평화롭게 잘 살기 위한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노자가 살던 춘추전국시대는 그야말로 전쟁이 일상이던 시대였다. 노자가 그리던 평화나 중국 민중들이 염원하던 평화는 임금이 누구인지, 마을 원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아무 간섭 없이 농사를 짓고 가족과 함께 등 따뜻하게 먹고 마시며 격양가를 부르는 ‘무위의 평화 상태’이다. 이러한 ‘무위의 평화 상태’를 민중들이 집단적으로 실현하면 ‘무위의 평화 공동체’가 이룩되며, 이게 잘사는 것의 요체이다.
노자가 바라는 이상 국가는 서로 얼굴과 이름을 알고 살 수 있는 작은 나라이다. 지방분권이 잘 된 지구촌공동체를 의미한다. 노자의 평화는 오로지 백성들이 맘 편히 살 수 있도록 위정자들이 백성들을 위한다는 면목으로 무언가를 하겠다고 일을 벌이고 전쟁을 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노자가 꿈꾸던 이상적인 공동체국가는 학식이 중요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먹을 것 입을 것 살 것이라는 의식주 여건이 좋아지고 그래서 문화와 풍속이 좋은 평화로운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것이다.
노자의 평화사상은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생태 위기, 자원 고갈, 인종갈등, 사회 분쟁, 정신적 불안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여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현실적인 깨달음을 주고 있다. 달리면서 나는 끊임없이 이 길이 아닌데, 아닌데 끝없이 번뇌하며 평화의 길을 모색한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강명구의 마라톤문학’
http://newsroh.com/bbs/board.php?bo_table=gm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