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난 부여읍내에서 주말이면 20리 길을 자전거타고 할머니댁에 가곤 했다..때로는 할머니 동네에 사는 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가기도 했다....난 우리 5남매 중에 제일 오래동안 할머니 할아버지와 산 네째 손자다..초등학교 3학년 가을 읍내에서 선생님을 하고 계신 아버지 어머니와의 생활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 시절 기억 한토막..
엄마 보다 자주 뵐 수 있었던 아버지가 하루는 날 자전거 앞에 걸터 앉히고 금강을 나룻배로 건너 방파제(대부뚝-이라불렀다)위의 우마차길을 따라 강경 거쳐...논산으로...갔다. 아버지가 사는 집 대문 앞에 예쁜 어느 아주머니가 서계시는데..."엄마야" 란다...그 순간 기분이 묘했다... 엄마?... 엄마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그만큼 난 어려서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많은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자라 부모님의 존재감을 느끼질 못했다...
할아버지 환갑잔치에 모인 식구들. 가운데 밝은 옷을 입고 있는 아이가 필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리' 단위 마을에서 '읍' 단위로 업그레이드된 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할머니댁 벽을 예쁘게 재단장한 새하얀 석회벽에 낙서를 한 나의 숨겨진 붓글씨와 그림 재능이 빛을 보게 된다. 4학년때 제1회 소년 한국일보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최고상과 그 이후 습자부(서예)에서 대회를 출전해 충남에서 특선을 하는 등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각종 미술대회에 나가 상을 받게 되니 자연스레 천직으로 받아들여진거다....
사실 어렸을적 나에게 미술 재능이 어떻게 있을까? 궁금했다. 언젠가 작은아버지가 "네 아버지가 교원 서예대회에서 상을 받았단다...네가 물려받은 모양이구나" 하셨다. 아 그랬구나..^^ 난 아주 자주 아버지가 붓글씨를 쓰는 장면을 목도(目睹)하게 되었고 한복을 입으시고 먹을 가시는 어머니도 그 시절에 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한번도 나에게 직접 말씀하신적은 없으시지만 상장과 트로피, 부상을 받아 왔을 때...내심 흐뭇한 미소를 보이시곤 한 기억이 난다.
소의 여물을 쑤기 위해 불을 지피고..소를 먹이려고 꼴을 베러 갈때 막내 작은아버지는 날 소 등에 올려주셨다... 어린 눈에 너무나 넓게 보였던 보리밭.. 타작이 끝난 보릿대 위에 누워 자던 나를 깨워 뭔가를 입에 넣어줘 두툼하고 구수한 살을 맛나게 먹었는데 개구리 뒷다리인 것을 알려주며 놀리시던 작은아버지의 장난도 아련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계절마다 각기 다른 놀이를 하던 추억들도 새록새록 떠오른다...비가 많이 와서 도랑에 물이 흐르면 조그맣게 흙으로 둑을 쌓고 호박잎 줄기대로 수로를 만들고 그 낙차(落差)에서 떨어지는 수압을 손끝에서 손목까지 골고루 아주 미세한 물의 두드림을 느꼈다. 여름에 동네 형과 친구들과 함께 금강어귀에서 온몸에 매끌매끌한 검은 진흙을 바르고 미끄럼타듯 강속으로 들어가면 순식간에 눈부신 몸으로 변신, 두 엉덩이 사이로 뒤에 남겨진 예리한 선들이 예술이다...ㅋㅋ ..
게를 잡는다고 강가의 조그만 게 구멍에 손을 넣었다 물리고, 수박서리며 참외서리,...대보름 풍습에 ‘밥을 훔쳐가라’며 미리 솥에 한 공기씩 넣어두었던 밥이며 나물을 친구들과 몰래 들고 나오는데... 이미 어른들은 눈치채고 방에서 잔 기침을 일부러 하신다... 그렇게 '미션 임파서블'이 되어 아쉬워하곤 했다.
추석무렵엔 학교 운동장에서 팽이 치는게 일상인데...그때 나뭇가지에 모시를 묶은 팽이채가 없으면 학교 울타리의 무궁화 가지를 대신 썼다...악동들덕에 남아나질 않으니 단체로 선생님 꾸중을 들으면서도 낄낄대곤 했다. 겨울엔 서너뼘 되는 철사를 구해 톱과 못으로 썰매를 만들어 타며 얼음 밑에 돌아다니는 붕어들을 잡았다. 그 추운 겨울에도 수렁주위엔 얼음이 잘 얼지 않는 것을 모르고 썰매를 지치다 좌우회전과 스톱이 늦어 빠지는 바람에 할머님이 "아이고 저녀석' 하시며 부지깽이(장작을 땔때 뒤적이는 나무손잡이가 달린 쇠꼬챙이)를 많이도 들게 했다. 철없던 어린시절의 시골 생활을 통해 나의 예술적 정서를 만들었지 않나 생각한다. 아마 그 시절의 에피소드를 쓸라치면 하루해가 모자란다...ㅎㅎ
중학교때 할머님댁에 가려면 20리길을 걸어갔다. 가는 길 주인 농부님께는 송구하고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지만 과일밭, 무우밭이며, 땅콩밭, 밀밭 등은 어린 우리들의 간식 제공처였다. 환한 표정으로 맞아 주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갑자기 손주를 위해 분주해 지신다. 할머닌 밭에서 열무와 가지 오이 등을 가져오셔서 신기하게도 짧은 시간에 손주의 입을 즐겁게 해주셨다... 여러 종의 과일나무들이 집 주위에 있어 고구마, 감자, 홍시, 대추, 살구, 포도, 곶감, 밤 등 계절별로 맛과 색깔이 눈과 입을 즐겁게 했다..
‘사람은 과거를 먹고 산다'고 했나? 세월이 많이 지났음에도 강렬히 남겨진 어릴적 아름답고 진하게 남은 기억들을 따라, 내가 사는 이곳 ’사랑마운틴‘에 재구성하느라 엄청난 육체적 노동을 들였다. 텃밭을 만들고, 유실수와 도라지, 예쁜 꽃나무들을 심었다.

사랑 마운틴의 텃밭..장독들도 아련한 추억이다
어느 가을 할머니 따라 밤따러 가는 길에 밑둥이 흰색부터 연노랑과 초록색, 밝고 진한 밤색까지, 잘 낸 구두광택보다 더 반들반들한 상수리들을 주웠다..너무 예쁘고 아름다워 주머니에서 꺼내보기를 반복하며, 할머니께서 따주신 풋밤을 입으로 겉껍질을, 손톱으로 속껍질을 깔 때 풍기던 냄새며 맛을 잊을 수 없어 밤나무도 심었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사랑마운틴의 풍경은 조부모님과 보냈던 옛 시절을 자주 떠올려준다. 그분들이 참 그리워진다.
오늘도 텃밭에서 호박잎과 오이, 고추를 땄다. 타주에서 생활하던 친구 딸이 오랜만에 뉴욕에 올라 왔다. 한국의 시골 맛을 먹이고 싶어 준비한 하루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조성모의 Along the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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