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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의 영웅적 쾌거가 아니라 최악의 수였다. 우리 장병 3만명이 희생된 금성천 전투의 비밀. 인천상륙작전은 알아도 평안도 참패는 모른다. 이승만 자진하야의 꼼수. 하와이 망명을 움직인 보이지 않는 손. 우리가 알아야 할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현대사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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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애틀리 합의의 중요성 <下>

트루먼-애틀리선언 65주년 
글쓴이 : 김태환 날짜 : 2015-12-12 (토) 11:00:11

   

이 선언은 남북 분단을 가져온 얄타(Yalta) 회담 이후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 최대의 국제 협약이다. 이점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알고 있는 소수는 입을 봉하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조약이 아니드라도 강대국간의 선언 또는 협약 등이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것은 큐바 미사일 사태 해결 타협이 웅변(雄辯)으로 말해준다. 즉 그 때 쏘련이 큐바에서 미사일을 철거하는 댓가로 미국으로부터 큐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는데, 그 이후로 바로 코 밑에 있는 큐바를 미국이 50 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약속을 지켜서 눈엣가시 같지만, 손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1950128일 발표된 선언하에 우리가 휴전선을 경계로 60 여년이 지나도록 트루만-애틀리 선언의 틀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선언 덕분에 첫째, 중국으로 전선이 확대 되지 않아서 세계 대전을 방지했고, 둘째, 휴전을 막무가내로 반대한 맥아더는 다음 해 4월에 파직 송환 당하고, 세째로는 아쉽지만 무력 통일로 가지 않고, 네째로 한 반도에 휴전이 달성되어 완전한 평화는 아니더라도 평화가 정착되어 적어도 남한만은 경제적 번영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애틀리 수상으로부터 무안을 당한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가 함부로 미국의 전쟁 수행 정책에 대해 대외적으로 발표하지 못하도록 합참을 통해서 맥아더가 대외 관계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기 전에 외교 문제는 국무 장관, 국방 문제는 국방장관의 사전 허가를 먼저 받은 다음에 발표하도록하고 사본을 반드시 백악관에 먼저 제출하도록 합참의장 브래들리 장군을 통해 지시했다. ( 1950126: JCS 98134 )

 

입이 열개가 있어도 업신여기든 중공군에 당한 참패에 대해 변명할 여지가 없겠건만, 그는 워싱턴이 자신에게 증원군을 보내지 않고, 한 팔을 뒤로 묶어 두었기 때문이라며, 책임질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이 만주 폭격, 국부군의 본토 수복, 한국전쟁에 국부군 사용, 그리고, 한반도에 핵 폭탄 사용을 주장했다. 그는 잘한 것은 자기 공로요, 잘못되는 것은 모두 남탓만 했다.

 

맥아더 독자적 최후통첩 발송

 

크리스마스 직전에 워커 8군 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당시 육군 참모차장이던 리지웨이 중장을 그의 후임으로 보냈다. 서울을 다시 내주고 (195114) 평택선까지 내려간 유엔군을그는 더 이상 후퇴를 못하게 하고, 다시 차근차근 북상을 시도해서 서울도 다시 찾고, 38선을 눈 앞에둔 상황에서 트루만 대통령은 중공에 휴전을 제의하는 문안을 국무부에 지시하여 국무부와 국방부 그리고, 합참이 문안을 다듬으면서, 맥아더 장군에게도 그 문안을 검토하도록 보냈는데, 그는 그것을 보고 (1951320) 본국 정부가 한국 전쟁을 휴전으로 끝내려는데 반발해서, 공산군 최고 사령관이 자신에게 항복하도록 요구하고, 그러지 않으면 중국 본토로 전선을 확대한다는 사실상 최후통첩(最後通牒)을 발송했다. (1950323)

 

이로써, 자신이 제의하려는 휴전안을 백지화(白紙化) 시킨데 대해 격분한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를 해임시키기로 작심하고 역사적 전례를 들쳐 보았다. 즉 종전에 대통령과 군 사령관 사이에 이견이 있을 때, 전임 대통령들이 취한 행적을 살펴 보았는데, 폴크 대통령이 단호한 행동을 취하고 그 결정사항을 의회에 천명하는 용기를 보여 준 것이 마음에 들어서 자신도 맥아더 해임 문제를 단호히 처결할 결심을 했다.

 

그런든 참에, 45일 공화당 하원 원내 총무 마틴 의원이 자신이 보낸 서신에 대한 맥아더장군의 답신을 의회에서 낭독했는데, 그 편지에서 마틴의원이 제시한 국부군을 사용하여 중국 본토 수복을 위한 제 2 전선 구상에 맥아더 장군이 찬동을 표시하며 그가 애송하는 구절인 전쟁에서 승리이외에 대안은 없다를 되뇌였다.

 

트루만 대통령은 측근 고위 참모들에게 그의 의견을 제시하고 그 동안 합참과 맥아더 장군간에 오고간 서신을 주고 검토해서 다음날 다시 모여 회합한 결과 참석자 모두 해직에 찬성했다. (195149) 또한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합참 구성원들의 동의도 얻었다.

 

맥아더 파면 소환

 

이에 트루만 대통령은 분노가 극도에 달해 맥아더에게 자진 사퇴의 명분을 주지 않겠다면서 그 개 xx(SOB) 에게 사표를 낼 기회를 준다는 것은 말이 않되고, 내가 그의 목을 짤라 (파면시켜) 야 한다고그의 부관 조지 엘시에게 단호히 말했다. 혹시 회의내역이 미리 새어 나가서 맥아더가 먼저 사표를 낼까 염려 되어서, (백악관 교환수들이 한밤중에 출입 기자들에게 전화를 해서 백악관으로 불러서) 기자회견을 밤늦게 열어서 해임을 전격 발표했다. (1951411일 새벽 1)

 

트루만 대통령이 내세운 파면 사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정한 대외 정책과 한국전 수행지침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고 (Insubordination), 둘째, 차제에 군의 통수권은 문민 우선인 전통을 제대로 살리며, 셋째, 한국전을 국지화하여 (맥아더가 저지를지 모르는) 3차 대전으로의 비화를 막으려했다.

 

맥아더의 파면과 본국 호출을 당한 것을 보고, 국부 이승만 박사는 그 분 (맥아더 장군)이 나를 가장 잘 이해해줬다고 못내 아쉬워했다. 그의 가장 큰 빽이 나동그라졌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 트루만이 휴전을 제의하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틴 의원의 맥아더 편지 낭독 사건이 맥아더 파면 직접 원인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트루만의 휴전 제안을 뭉개버리고 자신이 내보낸 최후통첩이 주 원인이다.

 

브래들리 합참의장 한국전은 잘못된 전쟁

 

파면당해 본국에 소환된 맥아더는 마치 개선장군(凱旋將軍)이나 되는듯 행동했다. (뉴욕 맨하탄에서 5백여만명이 마중한 티커 테입 환영 등) 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면서 전쟁에서 승리이외의 대안은 없다고 주장을 폈으나, 바로 그에게 갈채를 보낸 의회에서 증언하러 나온, 합찹 의장 브래들리 장군은, 지금 치루고 있는 한국전쟁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과 싸우는 잘못된 전쟁이라고 지적했다. 즉 미국은 유럽 (장소)에서, 더 적절한 시기에, 쏘련을 상대로 (주적) 해서 큰 싸움을 치뤄야지 현재처럼, 한반도에서 중국과 싸움을 치루는 것은 시기, 장소, 주적이 다 잘못 선택된 전쟁이므로 제한전으로 빨리 끝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그 이후로 트루만 대통령과 합참의 결정이 옳았다는 점이 널리 알려져서 맥아더는 입을 다물었고, 세간의 뇌리(腦裏)에서 사라져 뉴욕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여생을 마쳤다.

 

트루만의 휴전 노력

 

맥아더에 의해 트루만 대통령의 휴전 제안이 불발로 그쳤으나, 그는 그것으로 휴전 노력을 그친 것이 아니라, 애치슨 국무 장관에 밀명(密命)을 내려 공산권과 접촉해 휴전을 추진하도록 지시 했고, 애치슨 장관은 국무부의 쏘련통이지만 당시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연구중이던 대쏘 봉쇄 정책의 입안자 케넌(Kennan) 씨에게 쏘련의 유엔 대사 말리크를 접촉해서 휴전회담을 추진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케넌씨는 주 쏘련 대사관 (모스코바)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말리크와 선이 닿아서 그의 롱아일랜드(Long Island) 별장에서 만나서 그를 설득하여 휴전 제의를 하게 하여 말리크 대표가 유엔 평화 관계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휴전을 한국전 교전 당사자들에게 제의하였고 (1951623) 그 이후는 다 잘 알려진 사실이라 생략한다. 이면 교섭이 있었다는 것을 당시에 발표하지 않아서 쏘련이 먼저 휴전을 제의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인기 없는 전쟁에 미국의 젊은이들이 계속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뜻으로 트루만 대통령이 휴전 교섭을 강력히 추진했다.

 

   

한편 애틀리 수상이 트루만 대통령과의 역사적인 선언에 성공한 배경엔 19451115일 원자탄 사용에 관해 트루먼과 캐나다의 맥켄지 킹 수상 등 3자간 합의문이 존재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당시 워싱턴DC에서 3국 수뇌가 모여 원자탄을 파괴적인 무기가 아니라 평화적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합의하고 문서로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윈스턴 처칠에 가려 있지만 애틀리는 영국에선 마가렛 대처와 함께 20세기 가장 유능한 수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차대전 종전 직전 영국 연립정부에서 처칠 수상이 외교 군사 등 외치에 치중하느라 수상 대행 업무를 맡았던 그는 1945년 선거에서 대승하고 노동당 최초의 수상이 되었다.

 

영국은행과 철도 석탄 가스 전신전화 등 중요한 기간산업(基幹産業)을 국유화하고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복지정책을 시행하는 등 오늘날 사회 민주주의의 모델을 확립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1951년 선거에서 패해 수상직을 다시 처칠에게 내주었다. 처칠과의 아이로니컬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별첨해설:

1. Amb Chang: 장면 대사 딘 럿크 면담

2. Final Communique

3. Not Unifying 유엔 목표는 침략 격퇴, 무력 통일 아니다: 미 유엔대사 위에서 7~11

4. NSC Meeting 74 휴전 논의

5. Secret Memo on ABomb 트르만과 애트리 밀약

6. UK Version 영국 문안에 5 번과 같은 내용이 기록됨

7. McGrath point out 3 번과 같은 내용 (6 페이지 Line 28 from Top: The Attorney Gene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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