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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희, ‘불멸의 남자 현승효’
1974년 경북대 의대 본과2년, 박정희유신독재 철폐운동 주도하다 제명후 강제징집돼 제대 4개월을 남기고 폭염에 완전군장 구보훈련중 사망한 현승효. 그에겐 뼈가 녹고 피가 말라도 식지않는 불멸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28개월간 수첩에 빽빽이 적어놓은 그립고 애달픈 연인의 사연들, 30년만에 빛을 본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를 뉴스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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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회향학적 원리(14)

제1장 회향적 존재
글쓴이 : 현승효 날짜 : 2023-06-12 (월) 22:53:14

1장 회향적 존재

 

 

그것이 아무리 매혹적인 효과를 발휘하더라도 그것은 외부에서 조망하는 방관적 신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존재 형식을 자기경신의 운동으로서 발견하며 본래적 자기존재에 도달하려면 이 운동 전체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현재에 있으면서 동시에 전체에 속해 있음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상의 전망은 자기존재의 근거에 도달하기 위해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양극으로 절대화된 그릇된 태도를 택할 경우, 역사와 세계의 외부에서 방관적 태도로 개탄하거나 칭찬 또는 열렬한 희망을 늘어놓을 뿐 역사에 대한 진지함과 성실성을 잃고 오직 몰역사성의 포로가 될 뿐인 오류에 사로잡힐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예견되어 있고 질서정연한 추이에 의해 결과가 나온다고 세계 자체를 맹신하는 자에게는 새삼스럽게 용기를 고취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현존재를 절대화함으로 인간의 운동성을 우연성의 좁은 틀 안에 밀폐시키고 가능성의 광역을 포기할 경우 우리는 인간성 자체를 상실할 것이다.

 

따라서 현존재에게 전체는 불가피한 상황의 특수성으로 인한 파편화 때문에 국부적 전망과 배열에 제한되어 파악되지만, 동시에 이러한 전망과 배열로부터 인간은 전체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율배반이 제기된다. 이 양자의 통일에 이르는 길을 걸어가려고 할 경우, 언제나 인간은 자신에게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즉 인간은 가능성의 광역에 눈을 돌리면서 현실적 결단 위에서 정당한 계획을 작성하고 초월자의 언어를 한 자씩 판독하며 가는 유일한 길, 자유를 향해 끊임없이 투쟁을 전개하는 길에 눈을 돌려야 한다.

 

현존재로서 상황의 특수성에서 탈출할 수 없는 인간이 자기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더라도, 그는 자신의 경험상 현존재 수준에서 근거 있다고 파악한 것을 자신의 본질적 존재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의식 그 자체는 사실상 의식에 대해 타자인 것에 의해, 그가 속해있는 상황의 특수성에 의해, 사회적 사정에 의해, 영향력 있는 자력(磁力)의 특수성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시대를 초월하여 역사 전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운동의 전진경로를 전체적으로 전망할 때, 그 전진경로 전체는 편협한 공간에 제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 제 행위의 전진을 위해서는 오히려 거의 무제약적 공간이 허용된다.

 

현존재와 존재 자체

 

인간은 하늘과 땅,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숭고한 사상과 비참한 고통 사이에 놓여 있다. 인간은 지식에도 목마름을 느끼지만 물에 대한 목마름도 느낀다. 이것이 인간의 실제 모습이다. 그래 서 세상 자체가 불완전하다. 인간에게는 현존재적 존재만 문제가 아니라, 존재 방식도 문제다. 그러한 존재방식을 자기 책임 아래 결정하는 것이 인간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 사람이 선악을 분별하게 되었으니(판단의 시작이다),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이는 선악을 모르는 영생적 존재에서 선악을 구분하는 유한한 존재로, 나아가 영생과 구원에 이르는 노정을 요약한다. 인간의 추락은 인간이 자기를 아니 모든 것을 존재 그것도 현존재로 간주하는 데 있다. 이로써 그는 자기존재 자체와 분리되고, 실향이 시작되며 추락의 장이 열린다.

 

추락을 감지하기 시작할 때 본래의 자기존재 내지 고향은 추락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이것이 회향의 출발점이다. 유이자 무인 존재가 자신을 현존재로, 즉 자기의 진정한 실재와 분리된 존재로 파악하게 되는가?

 

이것은 주어짐던져짐 이라는 관계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그러한 관계 속에서 자기를 그 관계에서 이탈하여 독립된 개체적 존재로서 보존하고자 한다. 따라서 회향, 즉 자기존재 자체와의 일치는 개체적 존재의 무화 내지 개별 관계의 파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기를 관계 속에서 독립적으로 정립함으로써 그 관계는 불일치의 현장으로 보인다. 여기서 분리와 운동이 시작되고 현존재는 죽음 위에서 떠돌며 죽음과 결별할 수 없는 숙명적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죽음은 이러한 운동을 개념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 판단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판단이다. 왜냐하면 판단은 정지를 본질로 하지만 무에 대한 판단은 정지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판단은 자기모순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무가 존재의 토대라는 것밖에 알 수 없다. 여기서 최초로 주어진 관계는 운동에 대한 판단의 가능태로서, 인간 자체는 관계와 무관하게 관계를 포착할 수 있는 선험적 존재라는 것이다. 판단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자, 이 선험적 존재야말로 우리의 존재 자체이다. 이 존재 자체가 관계에 관여함으로 타락과 추락은 시작된다. 즉 존재 자체의 입장에서 볼 때 인식은 추락의 최초 형태다. 선험적 존재인 존재 자체는 비운동적 가능적 존재, 죽음 이전의 상태, 판단 이전의 상태, 성서적 존재 이전의 존재, 비관계적 존재다. 이 선험적 상태는 그야말로 공()이다. 우리가 사유하는 한 이것은 존재가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실재성에서, 또 한편으로 비실재성에서, 즉 관계와 선험에서 인간의 사유는 진행되며, 이것을 일원화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다. 존재와 비존재는 인간 존재 자체의 양면이다. 우리는 철학하는 한, 즉 사유에 들어가는 한, 양자의 통일, 회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실재성과 비실재성의 통일, 공이며 실()인 일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으로 되는 궁극적 목적지다. 철학은 주어진 상태를 그 궁극적 근거로 환원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귀납적 방법이 쓰인다. 그러나 철학이 존재 전체의 근본 원리를 파악하려고 할 때 귀납으로 도달하는 보편적인 것은 철학적 인식이 목표로 하는 원리적인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궁극적 근거나 원리는 소여의 평면상에 머무는 귀납법에서 다시 한 번 비약을 요구한다. 그것은 귀납법이 도달할 수 없는 심층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현존재의 피안으로, 현존재의 배후로, -현존재 영역으로 들어설 것을 요청한다.

 

여기에는 모험과 파괴라는 심연으로의 침몰이 있다. 그러나 심층에 도달함으로써 동일한 존재는 심층의 반향에 의해 소여에 머물지 않고 개조와 변혁으로 전환한다. 그것은 하나의 반향에 의해 인도되고 안내되는, 반향이 부딪쳐서 파괴되고 변조되는 하나의 바윗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층 존재의 근원적 원리인 존재 자체는 현존재의 피안에 있는 제삼의 존재이며 포괄자다. 그것은 주관이며 동시에 주관이 아니고 객관이며 동시에 객관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말 없는 존재이며 이미 현존재로서의 존재가 아니다.

 

자연적 존재에 우리는 현상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 우리는 유한한 양에 의해 자연적 존재에 도달한다. 하지만 인간 자체에 는 시공을 초월해서 도달할 수 있다. 대상이 존재 파악의 영역인 정신적 존재일 경우 그때의 존재 파악은 존재 자체로 향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때의 일치는 일부분에서의 일치가 아니라 전체 존재에서의 일치이기 때문이다. 배경적 전체 존재와 대상적 존재 는 일자로서 완전성 속에 있게 된다.

 

여기서 배경인 정신 영역은 분리될 수 없는 전체적인 것이다. 반면에 인간의 현존재는 언제나 한계 속에만 있기 때문에 무제약성에까지 이르는 정신 영역의 일부분을 이룰 뿐이다. 따라서 현존재적 존재로 존재 자체의 완전성을 대체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진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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