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 무한의 운동량을 정지시키려 한다. 그러나 동물은 단지 운동 속에 있을 뿐이다. 식물도 이런 점에서 동물과 동일하다. 인간은 운동의 본체가 불일치임을 알고 이 불일치에 불일치로 대응하는 운동의 최고형 태, 즉 투쟁의 존재이며 여기에 인간의 위대성이 있다. 신을 상정 하는 것도 이 무한한 운동량의 정지와 결부되어 있다.
사계의 변화 등은 불일치의 영구적 지속이 아니라 복귀라는 의미에서 단순한 반복에 불과할 뿐이다. 불일치가 연속적 지속으로 주어지지 않을 수 없다면, 문제는 이러한 불일치의 경로다. 단순한 연속적 지속 속에서 A⟶B⟶C⟶D로 이어지는 운동체는 단지 불일치의 연속적 지속일 뿐이다. 그것은 하등의 목적도 내포하지 않는 단순한 운동체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불일치 속에 던져짐에 의해 단지 불일치를 연속적으로 지속하고 있는 운동체다. 여기서 불일치가 갖는 상충관계는 영원한 과정에 있을 뿐이고 양자의 통일은 영원히 유보되어 있다.
우리가 자연계에서 보는 끊임없이 유전하는 불일치의 경로, 즉 운동의 경로는 반복과 순환이다. 사계로 이어지는 태양의 순환과 또 다시 씨앗을 잉태하는 저 무수한 나무를 보면, 그것은 하나의 반복과 복귀를 이루고 고리를 형성한다. 그것은 엄정하고 체계적인 질서 속에서의 불일치의 연속적 지속이지만, 단순한 불일치의 연속적 지속이 아니라 반복과 순환 속에서의 불일치의 연속적 지속이다. 하나의 씨앗은 또 다른 씨앗을 잉태한다. 적도에 위치한 태양은 하나의 순환을 경과한 뒤 다시 적도로 복귀한다. 혜성은 자체의 질서 속에서 반복되는 타원을 그린다. 이 경이로운 자연계의 운동은 맹목적이거나 무질서하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이 단순한 불일치의 연속적 과정이 아니라는 점에서 어떤 힘이 개입된다고 할 수 있으며, 이때 의지가 문제로 된다.
자연계에서 불일치의 연속적 지속, 즉 운동형태는 하나의 목적과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우주적 무한 공간 속에 유실된 하나의 유성일 지라도 그것은 자연계 속에 있는한, 질서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복귀와 순환 속에 있으므로, 단순한 불일치의 지속으로 오직 파괴성만 지니면서 A⟶B⟶C⟶D 로 이어지는 운동체와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계가 A⟶B⟶A⟶B 로 이어지는 점에서, 자연계에 내재하는 목적과 의지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인류는 역사의 시작부터 자연을 의지적 존재로 보아 대화의 상대로 삼았다. 우주는 일종의 의지에 의해 작동하며, 일종의 자동 조절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속된 의지이고, 강제된 의지에 불과하다. 자연계가 인간적 의지와 별개의 의지, 자연적 의지를 지니고 있더라도, 그것은 오직 반복 속에 있을 뿐 불일치의 종식, 일치의 완결, 곧 불일치인 운동 자체에 대한 전면적 거부로서의 의지는 아니다.
자연은 자연적 의지에 의해 불일치의 상충관계를 일치로 완결하기는 하나 그것은 결코 불일치 자체에 대한 거부의 의지로 승화되어 있지는 않다. 동시에 여기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발전적 의의는 없다. 발전은 반복과 상이한 것이다.
인간은 운동의 원인과 목적을 결과라는 완전한 통일에서 종결하고자 한다. 인간의 운동은 그 완전한 통일체인 자유로 가는 진행과정이며, 그래서 인간에게만 발전이라는 개념이 성립한다. 발전의 궁극 상태, 원인과 결과가 완전히 통일되어 있고, 그 자체로 자족하는 상태가 되지 않으면 인간의 투쟁은 종결되지 않는다. 이 자족 상태가 없다면 또한 발전도 없고, 인간에게도 자연의 경우와 같이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자연 상태에서 운동의 양식이 반복이라면 인간행위에서 운동의 양식은 발전이다. 인간은 예지계에 속하면서 동시에 감성계에 속하는 존재다. 감성적 속성의 인간은 시공 속에 존재하며, 또한 인식도 시공의 척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예지계에 속하는 것은 순수하게 비시간적 비공간적이다. 따라서 인간은 시간적인 것과 비시간적인 것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비시공적인 것, 즉 절대자유, 절대선, 미, 진리 등과 같이 인간의 예지적 속성이 촉발될 때, 그것은 필히 시공에 제약되는 인간의 감성적 속성과 불일치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이 불일치를 자신의 것으로 감지 할 때 갈등하며 투쟁한다.
인간의 운동도 시간적인 것과 비시간적인 것의 불일치다. 여기서 운동의 본질은 불일치⋅모순이라는 것이 판명된다. 그러나 인간의 운동은 목적개념이 수반되는 점에서 자연적 운동과 구별 되며 따라서 인간적 운동을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투쟁이 그 목적인 통일장의 획득을 통해 종식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본래 상태인 자유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 비시공과 시공의 통일장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실존함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인간에게 이미 실존하는 투쟁도 없어야 할 것이다.
완전한 정지, 자족의 상태, 다시 말하면 자유의 완전성은 일체의 시공간에서 해방된 상태, 곧 신의 경지를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인 감성계의 일체 존재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현상계에서 자유의 완전성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운동이 시간과 공간의 불일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운동을 부분으로 나누어 사고할 때 거기에서는 모순밖에 유도해 낼 수 없다. 이 모순을 해소하려면 우리는 통일장의 원리를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일체의 것을 제약하지 않고 시공간을 생각 할 필요 없는 무제약의 완전성일 것이다. 즉 무제약의 과정에서만 모순이 해소되는 것이 운동의 성질이라면 시공으로 나누어서 고찰할 수밖에 없는 현상계의 운동은 모순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현상계를 인식할 때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조건으로 시간과 공간을 전제하며, 이때 운동을 필연적으로 모순으로밖 에 정의할 수 없다. 또 시간과 공간은 필연적으로 양적 개념인데, 그것이 양적 개념이기에 우리는 부분으로 고찰한다.
인간은 양적 개념을 필히 어떤 유한한 것으로밖에 알 수 없다. 사실 우리가 무한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또 그것을 정의하지만 결국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그것이 어떠한 성질의 것인지 어떠한 내용을 가진 것인지를 도저히 알 수 없다.
우리가 현상계의 인식에서 유한한 것으로밖에 인지할 수 없는 시공간을 조건으로 삼는 것은 순전히 인간의 유한성에 기인한다. 자신이 유한한 것에 속하면서 유한한 인식을 위해 어떤 무한하고 무제약적인 조건을 충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이 세계에서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은 일체의 유한한 사물뿐이다. 유한으로 전제된 것은 유한한 결과를 획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저 하늘에서 빛나는 별보다도 더 경이롭고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는 경탄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은 이러한 물음으로 표현할 수 있다.
어째서 우리는 우리 내면에서 해방을 의욕하고 만족을 모르며, 또 우리 자신이 유한함을 아는데도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무한한 실체를 발견하려 하는가? 왜 동물과 같이 자연의 자극에 따라 수동적으로 행위를 결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본능과 감성에 반해 행위하고 창조하고 유한한 자기존재를 부정하기까지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우리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던 속성, 마치 우리가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잊고 있었던 완전한 상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알 수는 없는 우리의 고향, 즉 자유가 우리의 모든 의지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또 자유야말로 자족적이며 완전한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실체가 그 자유와는 이질적인 자연 속에 떨어지면 모순이 생긴다. 이 양자의 혼합체인 인간은 갈등하고 투쟁하며 운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 운동은 잃어버린우리 자신의 회복을 위한 길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고향이 실존함을 알고 언젠가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고수해야 한다.
우리의 잊혀진 고향, 즉 완전성 및 절대이념으로서의 자유가 어떠한 것임은 우리가 알 수 없으나 우리는 그것이 실재한다고 상정한다. 이제 우리는 언젠가 고향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고수하며 망상과 공상이 아니라 우리의 현명함과 이성으로 무장하고 투쟁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현명하기 위해서는 목적지에 가장 가까우면서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두 번이나 고향에서 괴리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운동이 불일치 자체일 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운동의 최고형태는 불일치에 대한 불일치, 불일치에 대한 도전과 그것의 해소를 위한 운동, 즉우주 속에서볼 수 없는 괴이하고 가장 찬란하고 경이로운 인간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운동 양식을 취하는 것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다. 이것은 불일치에 대한 끊임없는 경신으로 이어져서 불일치의 연속적 지속인 운동의 종결에 이르는 일치로의 진행경로다. 이로써 불일치의 전제인 일치에서 불일치로, 다시금 불일치에 대한 불일치에 의한 일치의 완결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적 의지와 별개인 자유의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유의지란 자체 내에 원인을 가지며 동시에 이 원인에 따르는 발전 속에서 자신을 결과적 목적으로 완결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투쟁의 목적이 일치일 때, 투쟁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투쟁의 목적은 불일치의 해소와 통일에 있다. 따라서 인간의 투쟁은 평화라고도 해도 좋을
일치에 근거해서만 그 의의를 부여받을 수 있다. 이러한 목적을 망각한 투쟁은 단순한 파괴의 연속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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