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투는 양면적이다. 그 전면, 즉 비실재적인 것이 실재화되는 경로가 바로 인식이다. 그 이면, 즉 실재에서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창조다. 그런데 인식은 제약적 한정적인 것이며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명료성과 자명성에도 불구하고 무제약적 무한정적 자유의 속성, 즉 가능성으로서의 인간 실체에는 부분적 실현으로서의 의의밖에 지니지 못하며, 이로 인해 완전성을 향한 회향이 필요해진다. 완전성에 대한 갈망과 요구의 강렬함은 어떠한 자유정신의 소유자임을 자처하는 과학적 현실주의자들도 평가하지 못하는 인간적 사실이다.
이미 자투에 의해 실재는 의의된 것이 되며, 동시에 회향의 갈망은 인식과는 다른 경로인 비개념적, 비구상적, 무제약적인 것으로의 전진, 즉 형이상학적 현(弦) 과 공명을 일으킨다. 이제는 우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 실천적인 것이 대두되는데, 이는 자투의 이면인 창조의 영역, 형이상학적 영역이다. 실재적인 것과 대별해서 실천적인 것, 무제약적이고 비한정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운동이 회향이다.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예술가들이 그들의 창조에서 환상적인 것, 신화적인 것, 불확실한 것, 극단적인 것, 상징적인 것에 대한 감각, 개인적 과대평가, 천재의 기적적인 면 등에 대한 믿음 등을 버리지 않으려 하는 이유다. 회향을 고집하는 그들의 행위는 바로 인간의 보다 높은 기품과 의의를 위한 투쟁이다. 이제 인식적인 것, 환상적이며 초월적인 것, 형이상학, 종교, 예술, 신화 등 모든 인류적 사실의 비밀을 우리는 회향이라는 나침반에 의해 헤아리고 그 첩경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향의 길은 일견 우리를 좌절과 비탄에 마주치게 만드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있다. 하나는 자투에 의해 부여된 실재성과, 또 하나는 무제약적 불멸성이라는 이중의 장애를 동시에 넘어야 한다는 난제가 그것이다. 인류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회향의 이런 난제를 풀려는 경이에 찬 해결책은 불과 손에 꼽을 수 있는 몇몇 세계적 종교와 사상 그리고 보편적 창조에서만, 그것도 찰나적인 것으로만 발견할 수 있다. 회향의 길은 아직 인류가 실재성과 실천성의 정체를 명확히 파악할 만큼 정신이 성숙하지 못했던 오랜 과거에도 예감되고 탐색된 것이었다. 그것이 수천 년 종교의 역사와 사변적 철학의 역사를 형성하는 것이었고, 신화로 표현되기도 했다.
회향의 길이야말로 세계사를 가장 포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라고 할 수 있다. 역사철학 속에서 인류가 얻은 세계사의 열쇠는 세계이념의 실현, 계급투쟁, 자유의 확대 등으로 정의되고 있다. 회향의 과정이야말로 자유의 확대, 투쟁의 과정이며 동시에 종교사, 철학사, 그리고 예술사 등 제 영역의 최대공약수 를 형성한다. 회향의 원리가 구체적으로 다양하게 표출되는 영역이 세계사다. 세계사는 원리의 구체적 실현이 순수한 형태로 발견되고 구현되는 영역이며, 또 그 결과이기도 하다. 세계사가 보여주는 구체적 실례들은 범아라는 일치의 순일한 형태로 가는 전진을 결코 직선적으로 이루어온 것이 아니라, 우회와 도약 또는 퇴보로 점철된 과정을 거쳐 왔다. 현대조차 아직 범아에 대한 각성의 여명기에 있을 뿐이다.
세계사의 시간적 계열은 오직 인간의 궁극적 각성을 향한 복합적이고도 다양한 우회와 퇴보와 도약의 경로를 보여줄 뿐이기에, 세계사를 이해할 때 엄밀한 시간적 계열을 고수할 당위성은 없다. 세계사는 일치를 향한 각성에 비추어 재정리되어야 한다. ‘일치→불일치→일치’가 인간적 투쟁의 원리인 한, 그것의 진행 경로와 순서는 자연적 시간과 무관하다. 원초적 일치와 불일치의 변곡점, 이 두 변곡의 형식은 언제나 인간학적 시간, 인간 자신이 획득하는 일치량의 확산 시간에 기인한다. 그것은 투쟁의 원리가 자연적 현상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현존재로서 운동하는 인간은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는 측면에서 자신을 대상이자 동시에 주체로 정립한다.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그가 운동을 생산하는 주체라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운동을 생산하는 것이다. 주어진 운동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운동을 생산하는 것이다. 운동의 최고형태인 회향적 투쟁을 만들어내는 주체인 한, 현존재는 그가 처한 제반 조건과 자투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또 그 제약을 발판으로 엄연히 회향적 존재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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