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이 나의 철모위에서 부서지고 있다
4월 1일 1976년
오늘 독수리 작전이 시작되었다. 강바람은 힘이 세다. 날씨는 영하에 머물고 있다. 나는 오분전투대기 소대로 배속받아 종일 긴장 속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선 들에서 밤을 새워야 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깨엔 마치 판쵸빌라처럼 모포를 한장 감고 있다. 그리고 틈틈이 책을 보며 하루해를 넘겼다.
저녁이 되니 수송기가 한대 낮게 강 위에서 맴을돌더니 공수부대를 토해낸다.
우린 드디어 비상이 발동되고 차량에 탑승하고 그들을 생포하러 출발한다. 흥분과 즐거움도 수반된다. 이것은 군복을 입고 총을 맨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자그마한 자부심과 긍지가 배합된 그런 즐거움이다. 그리고 애들처럼 차를 탄다는 기쁨도 있다.
이것이 실전이라면 나는 아마도 노야의 얼굴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전우
들은 공포와 긴장으로 입술이 굳어지고 새로운 운명에 직면한 인간으로서 눈빛
은 광채를 발하게 되겠지. 이런 모의전쟁 훈련은 재미도 있고 고달프기도 하다
차를 타고 우린 강변에서 하차, 물이 발목까지 오는 개울을 여러 개 건넜다.
발에 물이 질벅거리지만 앞에서 물보라를 튀기며 달리는 전우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같다. 온몸에 땀이 흐르고 숨결은 거칠다. 그리고 땅에 납작 엎드려 전방을 정찰한다. 지척에 넓은 남한강이 꿈결처럼 흐르고 있다.
그리고 정신없이 달리기를 수 십분, 쌀보따리를 매고 따라오는 병사가 뒤로 처진다. 또 한 병사가 내 뒤로 처진다. 나는 고삐 풀린 말처럼 들을 가로 지르며 달린다. 그저 달리고 싶고 다리는 신바람이 나기 때문이다. 다시 승차, 공수병들은 흔적만 남긴 채 철수한 후였다. 이번엔 차 복판에 앉아서 바깥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하늘만 빠꼼이 보인다. 북두칠성이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마치 차가 소리만 내고 정지해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저 별들, 수 백년 전에 칸트의 가슴에 경탄과 끊임없는 동경과 신비를 준 저 별들이 여전히 나의 철모 쓴 머리 위에서 부서지고 있다. 수 시간을 시달린 우린 녹초가 되어있고 추위에 몸은 고슴도치처럼 웅크리며 흔들리는 차체에 몸을 맡길 뿐이다.
드디어 곡수 뒷산에서 하차, 본격적인 수색작업을 폈다. 깜깜해서 하나 보이지 않는데 산을 타야 한다. 발에선 넝쿨이 걸리고 이따금 아카시아 바늘이 손 다리 얼굴을 할킨다. 앞서 가는 전우가 넘어지기도 하고 나도 넘어지며 기며 수색하기 2시간, 놈들의 종적은 묘연하기만 하다.
허기지고 추워 모두들 땅에 누워 졸다가 놀라 깨곤 한다. 언 땅에서 밤을 나야
하는 건 고통이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인간의 투쟁과 투지는 단련되는 것이다.
우린 성과없이 새벽에 귀대했다. 노야를 생각하고 고향의 엄마를 생각하며 잠
이 들었다.
4월 3일 1076년
오늘 아침 8시에 자동화 사격장으로 떠났다. 30Km를 줄기차게 행군하다. 수도 없이 다니는 이 거리는 이미 나에겐 새로운 감회를 주기엔 너무나 낡았다. 빌어먹을 날씨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날씨만 좋다면 점심은 굶어도 좋을 것 같다. 저녁은 차가운 땅 위에서 밤새도록 떨며 잠을 설치다. 늦어서는 진눈깨비가 때린다. 개좆같은 이곳의 날씨, 따뜻한 태양이 진정 그리운 계절이다.
볼을 때리는 찬 기운과 모래 먼지 바람을 안고 진흙 황토 모래에서 살아야 한다면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입술은 타고 이건 사람 환장할 노릇. 그래서 북극의 사람은 표정이 근엄하고 손등이 큰가보다.
사격을 한다. 항시 방아쇠를 당길 때면 야릇한 흥분을 느낀다. 총이 잘 맞아줘서 고마운 일. 노야가 보고프다. 넌 지금 무얼 하고 있나.
4월 4일 1976년
오후에 텐트를 만지고 있으니 이 먼 곳을 영보가 찾아왔다. 아마 부대에 내가 없어 이곳 사격장까지 물어물어 온 모양이다. 통닭이랑 배 사과를 한아름 안고. 역시 우정이란 값비싼 거다. 한 2시간여 얘길하다 그를 6 Km 가량 전송하고 돌아오다. 우리 강하고 씩씩하게 살자며 손을 굳게 잡는다.
노야의 편지도 받았다. 오랜만에 듬뿍 영양을 섭취하고 대화도 나누고 비싼 담배도 선물로 받다. 배웅하는 길목에 서서 그가 까만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으로 떠나 보냈다.
하늘엔 그림같은 붉은 태양이 찬란하면서도 외로이 서산에 걸려 있었다.
이선생과 약속이 있어 시간에 늦을까 마구 달려간다. 잘가라 내 사랑하는 친구야!
***사랑하는 내님께
이번 이별은 유난스레 그 후유증이 오래 갔어요. 담임선생이 님 생각에 병이 나는 바람에 아이들에게는 신경을 못 써서인지 월례고사에서 우리 반이 꼴등 먹었어요. 그래서 아침에 공부 한다고 8시까지 오라 하고선 30분이 다 되어 가서 미안합니다 하고 절을 하며 깍듯이 사과했어요
어제 아침은 조기청소 갔어요. 일어나기가 얼마나 싫었는지! 그래도 어린 아이들이 선잠을 깨고 나올텐데 선생이 어찌 몰라라 하겠어요. 벌떡 일어나 갔더니 새벽공기가 싸알하게 매운 것이 참 좋군요. 아침산책을 꼭 해야지 마음 먹었습니다.
퇴근할 때 쯤 영보씨가 와서 다방에 가서 셋이는 다방에서 차 마시고 곰탕으로 저녁 먹고 이선생 방에서 11시 40분까지 놀다가 그는 자러 갔어요. 내일 이선생이랑 서울 갈려고 왔대요. 영보 씨가 당신에게 가신다 해서 편지 하나 썼습니다.
영보 씨는 배와 과자를 잔뜩 사가지고 와서 깎아서 우리 보고 먹으라고 하고는 번듯이 들어 누우면서 이선생 보고는 편안히 앉으라 하니 방 주인 이선생이 “참 나! 누가 이 방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헷갈리네.” 그래서 우리는 깔깔 웃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선생은 영보 씨의 저런 점이 좋고 편안한가 봅니다. 서울 간다 하니까 나도 가고 싶어 졌어요. 토요일 수업 마치고 갔다 일요일 밤차 타고 와서 몸 고된거는 겁나지 않지만 당신을 뒤에 두고 돌어서는 순간을 생각하니 도저히 갈 용기가 나지 않아요. 불현듯 미운 생각이 들고 그립고 ……
그전에는 저를 죽도록 사랑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이렇게 내팽개쳐 두다니. 내가 당신 흉을 좀 보고 연애 잘못했다 했더니 영보 씨가 얼굴이 벌개지면서 정색을 하고 화를 내더군요. 노양은 이 세상 여자와는 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함시롱, 제가 그런 말을 해서 순간적으로 실망이 되고 낙담이 됐나 봅니다.
나의 하늘같은 님인데 가끔 가끔 당신 원망하는 소리는 하지만 재미로 혹은 내 남자 자랑삼아 하는 말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 줄을 영보 씨는 진짜 모르는 멍청이인가 아니면 재미삼아 하는 거라도 싫어서 그러나 덩말 모르갔네유. 당신은 한 번씩 절 디기 미워합디다. 하지만 지금은 끔찍이 사랑하는 걸 아니 다 잊어주겠어요.
편지 많이 기다렸지요? 당신 생각이 너무 깊어 편지 쓸 여유조차 없었어요. 왜 당신은 편지를 안 했어요. 이십 일이 지나도록 단 한 번 뿐이라니!
이제는 원기도 회복됐고 기분도 많이 좋아졌으니 제 걱정은 마세요. 잘 지내 보겠어요. 차차 공부도 시작할거고.
영보 씨에게 푸념을 많이 늘어 놓았지만 다 빈 말이예요. 뭐라 그래도 저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하고 당신이 없으면 미쳐 죽어 버릴 것 같으니까요.
빨리 만나서 달달 볶고 싶어요. 억지 말도 골라 하고 아무도 당신에게 그러지 못하고 나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잖아요.
책도 좋지만 너무 눈을 혹사하는 거 싫어요. 당신 눈 깜박거리는 것 보면 얼마나 불안해 지는데. 영보 씨 만나서 좋은 시간 가지시고 제게는 길게 편지 한 통 써서 주고요. 1976년 4월 2일 노야.
4월 5일 1976년
언 땅에서 밤을 나야하는 건 고통이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인간의 투쟁과 투지는 단련되는 것. 날씨 개좆, 사격 엉망. 저녁 6시에 귀대. 행군 시작.
나만 쳐다보는 졸병을 데리고 뒤로 쳐져 버스로 돌아왔다.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이러다 한번쯤 경을 칠 것 같은 감을 항시 느낀다.
참 그리고 어젠 군의관 선배를 만나 대접받다. 박중위. 나와 수남이를 잘 아는 사람이였다. 언제나 군대란 우스운 곳이다. 그도 철없는 중위에 불과했다. 요놈들, 나의 이 졸병의 강함을 너희는 알 수가 없을거다. 아마 죽을 때까지.
돌아와서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 입으니 살 것 같다. 온몸과 입에 모래가 버석거렸다. 밤에 노야를 생각하며 푹 잤다. 노야 안녕.
***사랑하는 노야
이제는 기운을 차리고 씩씩해 지셨다니 고맙구려. 그동안 여러 통의 편질 띄웠는데 왠일인지 배달이 안 되었다니 답답한 노릇이오. 나는 건강하며 규칙적인 생활로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있소.
영보 군이 이 먼 곳을 힘겹게 찾아와서 즐거운 해후를 했고 포식도 했소. 달이 바뀌고 봄도 한층 당겨졌소. 밝고 건강한 노야를 생각하면 나에겐 어려움도 힘든 일도 푸른 하늘처럼 신선하게만 느껴지오. 세월과 시간을 갑갑하게만 여기지 말고 하루를 밝은 기분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하기를 바라고 빌 뿐이오.
고통괴 어려움도 순간에 불과한 것이고 지나간 시간은 눈 깜박 하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겠소. 언제나 장한 나의 노야에게 한없는 사랑을 보내오. 안녕, 승효.
4월 6일 1976년
오늘 나란 사람을 조금은 느낀 듯한 날이다. <병사의 휴식>이란 불란서 처녀의 책을 읽었다. 내용인즉, 알콜중독자이며 오직 그녀와는 섹스와 무절제한 생활로 세월만 죽이는 사나이와의 관계를 그린 소설이다. 이건 정말 웃긴다.
책임감도 가치라는 것도 못 느끼고 살며 어떤 노동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단지 쾌락만 가르쳐주는 섹스중독자와의 관계를 계속하는 어느 여대생의 얘기다
물론 불란서이니까 가능한 것이지만, 이 책을 읽다가 중간에 던져 버렸다. 속이 메스꺼워서 도저히 더 읽을 수가 없었다. 하기야 우리 주위에도 인간의 내적 가치를 상실한 채 탐식하는 인간상을 너무도 쉽게 발견한다.
이곳의 병사들 중에도 많이 있다. 밥만 먹으면 성교하고 또 하고 또 성교하고 먹고. 나는 적어도 그런 생활을 3일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이상은 나는 나의 생명을 앗아가는 그런 생활을 단호히 거부한다.
어쩌면 그렇게 빠져버릴 수 있는 인간 형태에서 무언가가 재발견 될지도 모른다. 외골수로 가는 인간에게만 무언가의 성과가 주어지는 거니까.
나는 움직이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질식하는 인간형, 그리고 항시 만족하지 않으며 쉴 줄 모르는 집념과 욕망의 사나이 그러면서도 하늘을 바라보는 신선함도 있다. 그리고 나 스스로가 용납되지 않으면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그런 인간으로 태어났다.
4월 7일 1976년
책의 구절들이 이해가 안되고 머리가 무거울 땐 모든 것이 권태롭고 괴롭고 이곳의 생활이 마치 지옥처럼 느껴진다. 몸에 날개라도 있다면 훨훨 날아서 달아나고 싶다. 노야 있는 곳으로. 귀와 코를 마구 뜯어버리고 싶다. 그러다 마구 움직이다 보면 다시 이해가 되고 책장이 넘어갈 땐 가슴에 환희가 넘실거린다. 이렇게 나는 나의 지식을 확대해 가고 있다.
4월 8일 1976년
불란서 여자의 그 소설에서 여대생에겐 전에 순결하며 스스로 책임을 질 줄 아는 애인이 있었다. 그러다 알콜중독자 남자가 다시 생긴 것이다. 그때 전 애인이 한 말, “너도 역시 여자라는 걸 나는 잊고 있었다." 라는 말이 오래도록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나는 문득 여자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어쩌면 무지할 정도로 한군데 빠져 버리고 욕망이 습관화한 생활 속에서 탈피하지 못하며 끝까지 가버리고야마는.
뒤를 돌아볼 줄 모르는 존재. 여자는 독하다 모질다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그건 적절하지 못하다. 여자란 순전히 자기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본능적 존재인지도 모른다.
대별해 보면, 남자는 그런 예가 여자보다 적고 쉽게 포기해 버리고 좌절해 버리며 주저앉아 버린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여자는 훨씬 현실적이며 본능적이고 잔인하기조차 하다. 그리고 여자는 한없는 저력을 지닌 존재다. 그래서 여자의 얘긴 지칠줄 모르나 보다. (어떤 땐 생명마저 소진시켜버린다)
그런 여자를 나는 사랑한다. 그 모습에 있어 훨씬 신의 모습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구하는 마음, 집념하는 마음, 심성은 여자에게서만 그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권태로워 하지도 않고 잘 견디는 그 모습은 헤라클레스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여자들은 쉽게 사랑한다.
4월 9일 1976년
매일 독서와 사색을 하며 보낸다. 멀고도 어려운 지성의 길이여! 차츰차츰 나는 지성을 넓혀가고 뇌에는 약간의 섬광이 비치어 가고 있다. 그러나 다시 나를 엄습하는 것은 무지와 난제에 부딪치는 이 두려운 진리에의 길. 요즈음은 간혹 이러다가 내가 영창에나 안 갈까, 징계나 안 당할까 하는 생각에 불안해지기도 한다. 모든 것을 너무 내 마음대로 하기 때문이다.
훈련을 따라 나와서는 산기슭에 주저앉아 버린다. 그리고 해가 서산에 기울도록 책을 읽고 졸고 한다. 점심을 거를 때는 없다. 고양이처럼 민가로 기어내려가 라면을 사먹고는 다시 나의 사색의 터로 가서 해가 지기를 기다려 귀대하곤 하니까 말이다. 핫하하!
나의 이 배짱은 과히 백만불짜리다. 이곳에서 나는 바깥에 있을 때보다 2배에 가까운 독서를 하며 보낸다. 이만하면 군대생활도 할 만하지 않은가.
그리고 저녁이 되면 역기 아령으로 몸을 단련시킨다. 나의 가슴은 많이 솟아 나왔다. 이 가슴으로 노얄 껴안을 날을 기다리며 하루를 소중히 보낸다. 이곳 지휘관이나 고참들은 나에게 압도된 지 오래이며 졸병들은 나에게 신뢰를 준다. 나의 천성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질식할 그런 성질인가 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nbnh&wr_id=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