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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泰格의 架橋세상
독일 프랑크푸르트 은행주재원 생활 4 년, New York 에서 20年 동안 生活하면서 뉴욕 최대일간지인 ‘New York Daily News’와 美 최대은행 ‘Bank of America’ 에서 근무했습니다. 'Bridge Enterprises'라는 사업체를 통해 韓國과 美國의 架橋를 자임한 이민1世입니다. 유럽과 美洲 양 대륙에 살아 본 사람으로써, 100개 이상의 종족이 어울려 살고 있는 美國과 뉴욕, 이민가정 子女들이 겪는 이야기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逢南 韓 泰格(www.Ted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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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지변(天災地變) Nepal 國民들과 슬픔을 같이 하며….

副題: 우리도 그들처럼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다.
글쓴이 : 韓 泰格 날짜 : 2015-05-06 (수) 15:37:17

 

충격적인 대지진을 겪은 네팔 당국이 지난 2일 구조 작업 중단을 공식 선언했다고 인도 힌두타임스가 3일 보도했다

 

지난달 25일 강진이 발생한 지 1주일 만이다. 무너진 건물 잔해 더미 속에서 더 이상 생존자를 찾아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힌두타임스에 따르며 네팔 당국은 이날 지금까지 계속돼온 구조 작업을 살아남은 이재민들을 위한 구호 작업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강진으로 사망자 수는 7400명을 넘었으며, 부상자 수도 14000명을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오지 마을들로부터 피해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파손된 가옥들의 수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 현재 15만채에 달하고 있는 상황이다.”

 

Nepal_Earthquake_2015_08.jpg

www.en.wikipedia.org

 

 

 

뉴욕한인방송과 언론매체에서 지난달25일 네팔전역(全域)에 몰아닥친 강진(强震)피해 이재민(罹災民) 들을 위하여 성금(誠金)모금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방송진행자들이 네팔에 대하여 아는 것 이라곤 세계 최빈국(最貧國)이라던가, 세계최고봉(最高峰) Everest산이 있는 나라라든가, 한인업소에서 일하고 있는 네팔인들이 근면하다든가 하는 정도다

 

평온(平穩)했던 10년 전인 2005년 필자가 Bank of America에 근무하고 있었을 때 썼던 칼럼을 다시 읽어보는 것도 뜻깊은 일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2005년은 작고한 좌파 노무현대통령 집권 2차 년도다)

 

*************

 

韓國語驅使하는 네팔(Nepal)西獨 派送 鑛夫

韓 泰格(Bank of America AVP)

 

폭설(暴雪)이 미 동북부를 강타(强打)하던 날, 필자의 고객인 Samurai Japanese Restaurant 주인인 Tozo Aoki 상으로 부터 일차 방문하여 달라는 전화가 걸려 왔다.

 

그 다음날 눈이 엄청나게 쌓여 도로변 주차가 거의 불가능하였지만, 도조상과의 오랜 거래관계를 고려하여 Dinner 시간이 지난, 조금은 영업이 숨죽은 시간에 맞추어 그의 Restaurant에 도착하였다. 악천후(惡天候)임에도 불구하고 방문하여 준 것에 감격하였는지 사토상은 오늘 저녁은 on the house 이니 Sushi Sashimi Sake 니 먹고 싶은 음식, 마시고 싶은 술 마음 놓고 마시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동양사람의 정()이 끈끈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니 도조상이 주방에서 앞치마를 걸친 건장한 30대 초반의 동양인 한사람을 데리고 나와, 주방장과 Manager 일을 겸하고 있는 사람이라며 인사를 시키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라며 본인은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은행원인 필자가 주방일을 하고 있는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라는 말인가? 의아(疑訝)해 하는 순간, 그 동남아인(東南亞人)의 입에서 저 한국에서 8년 살았어요. 김포에 있는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4, 강화도에 있는 인테리어 생산업체에서 4, 1990년에서 98년까지요. 저는 네팔사람이예요.”

 

외국인인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우리말에 필자는 깜짝 놀랐다. 이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에게 의자에 앉을 것을 권하고, 필자도 의자를 바싹 테이블 앞으로 끌어 당겼다.

 

도조상이 그를 데리고 나온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한국어 단어 실력은 대단하였고, 발음도 상당히 정확하였다. 그가 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기술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서 취업하였던 외국인 노동자였던 것 같았다.

 

네팔(Nepal)이라.. 필자가 네팔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라곤 지구의 지붕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로 수도(首都)는 카투만두이며, 백년설(百年雪)이 덮혀있는 히말라야산맥(Himalayan Mountains)이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그 산맥가운데 세계 최고봉(最高峰)인 에베레스트(Mt. Everest )산이 있으며, 네팔 사나이들의 용맹성(勇猛性)200년전에 이미 인지한 대영제국(大英帝國)이 네팔인들을 용병(傭兵)으로 채용하여 대영제국이 참전하였던 세계 1, 2 차 대전 및 세계 여러 분쟁지역으로 투입(投入)하였는 바, Gurkhas Battalion 이라고 불리우는 이 네팔인 부대가 혁혁(爀爀)한 전과(戰果)를 세웠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지난 몇년동안 모택동(Maoist) 공산주의자들이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벌리고 있어 내정(內政)이 불안하고, 2-3년전 왕실(王室)에서 의문의 암살사건이 일주일 사이에 줄지어 발생한 일이 있었다는 극히 단편적인 상식 밖에는 알고 있지 못한 나라였다.

 

그런 지구위 먼 오지(奧地)에서 온 청년이 우리말을 거의 유창(流暢)하게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필자는 무척 놀라웠고 반가웠다. 그리곤 한편 불안해졌다. 한국과 한국인이 어떠하였더냐고 물은 후였다. 그다음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가슴 조였다. 왜냐하면, 일부 한국의 악덕 기업 업주(惡德企業 業主)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고 그들의 인권(人權)을 크게 침해하고 있다는 보도를 자주 지상(紙上)을 통하여 접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은 다행히도 좋지 않은 이야기도 들었지만 제가 일했던 회사에서는 잘 해 주었어요.”

 

필자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처음에는 삼십만원 받다가 나중에는 팔십만원 까지 받았어요. 생활하고 조금씩 저축하였지요. IMF가 터지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한국에서 저축한 돈으로 결혼도 하고 방이 18개 되는 조그마한 모텔을 세()를 내어 비지니스를 시작했어요.”

 

비지니스를 시작한 사람이 미국엔 왜, 그리고 언제 왔는데?” 물었다.

 

관광지인 히말라야 산맥 산자락에 자리한 외부와 통하는 도로도 닦여있지 않은 조그마한 고향 마을(Mustang)에 비지니스를 열었는데 반정부 게릴라들이 그곳까지 쳐들어와 난리를 치는 통에 관광객이 몇년사이에 크게 줄어 들어 비지니스를 닫고 미국관광비자를 받아 들어왔다가 어학연수(語學硏修)를 받으면서 학생비자로 바꾸었어요. 저도 은행에 어카운트를 열 수 있나요?”

 

시간이 있으면 근처 Bank of America 지점에 들러 보라고 지점의 위치를 알려주고는 내가 단편적으로 알았던 사실 가운데 궁금하였던 몇가지 사항을 물어 보았다. 어떻게 한국으로 가게 되었느냐는 질문에는 대학에서 역사학과(歷史學科)2학년까지 다니다가, 네팔 청년의 최고 인기직종인 영국용병(British Mercenary-Gurkhas Battalion)에 지원하였는데 경쟁률이 1001이 넘고 요구하는 체력 조건도 무척 까다로와 낙방(落坊)의 고배(苦盃)를 마신 후, 한국에 있던 친구의 권유(勸誘)로 한국으로 날아가게 되었다고 우리말 반 영어 반으로 답하여 주었다. 한국에서 외롭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여덟명의 네팔친구들이 함께 일하였기 때문에 설 이나 추석때는 여러곳을 여행할 수도 있었다고 회상하듯 미소지으며 대답하여 주었다.

 

영국이 언제부터 네팔에서 군인을 뽑아갔냐고 물었더니 1812년 영국군 삼만명이 네팔을 침공하여 왔을 때 만이천명의 네팔군이 Kaphar hunnu bhanda marnu ramro (Better Dead than a Live Coward - 겁쟁이로 사는 것보다 명예롭게 산화한다)라는 정신으로 용맹스럽게 싸워 영국의 식민지화를 피할 수 있었다. 네팔군대에게 크게 참패한 영국군은 그후부터 협약에 의하여 네팔로부터 용병을 차출하기 시작하였다고 설명하여 주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통치할 때, 당시 인도의 식민통치에 필요한 군인들을 네팔에서 데리고 갔다는 사실(史實)1997년 영국이 홍콩을 중국으로 반환하기 전까지만 하여도 상당수의 네팔군인들이 대영제국의 유니폼을 입고 홍콩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까지도 알려주었다.

 

 

Gurkha Khukri-knife 2015 5 3.jpg

 

용병이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네팔국내에는 대학이 20개 정도 있는 데 대학을 졸업하여도 취직의 기회가 거의 없으며, 우선 네팔 정부군의 평균월급은 $100 인데 반해 영국군이 되면 15()$1,500을 받을 수 있고, 결혼하면 네팔보다 생활조건이 훨씬 좋은 지역으로 가족까지 데리고 갈 수 있어 자식들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를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15년 근무연한을 무사히 채우면 연금(年金)이 나와 환율이 높은 영국 파운드화()로 네팔에서 여생(餘生)을 아주 편안하게 보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반문하여 왔다.

 

그 약소국 청년들의 진로(進路)가 안타깝게 느껴지면서, 필자가 1970년대 독일에서 근무할 때 뒤셀도르프 본역(本驛, Duesseldorf Hauptbahnhof) 에서 함부르크(Hamburg) 행 기차를 기다리던 두이스부르그(Duisburg) 광산지역(鑛山地域)에서 광부로 노동하고 있던 교포청년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독일의 대부분의 교포들이 1960년대 중반부터 10년동안 광부(Bergleute), 간호사(Krankenschwester)로 파송(派送)되어 갔던 분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간호사로 간 분들은 독일인 환자로부터 인기가 대단하여 근무기간(勤務期間)이 자동적으로 연장되었으나, 부삽도 제대로 들어보지 않았던 대학졸업 출신자들로 구성된 광부들은 그다지 인기가 좋지 않아 근무연장이 허락되지 않았고 계약기간이 끝나면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뒤셀도르프역에서 만난 그 청년도 함부르크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고향처녀에게 공을 들이기 위해 갱()속에서 피땀 흘려 번 Deutshe Mark를 교통비와 교제비로 투자하고 있었다. 그녀와 결혼만 성사되면 그의 독일 체재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되고 사랑도 얻게 되니

일석이조(一石二鳥)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청년은 함부르그 고향처녀의 희비(喜悲)에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네팔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그 어려웠던 당시 뒤셀도르프 하우푸트 반호프에서 함부르크행 열차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던 그 청년의 얼굴이 오버랩되어 떠올랐다.

 

그 어려웠던 시절 당사자들을 제외하고 몇사람이나 이러한 처절한 상황을 기억하고 있을 까?

 

네팔청년들이 대영제국의 용병으로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 일자리를 찾아 여러나라를 전전(轉轉)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네팔청년들의 서글픈 현실(現實)60년대 대한민국의 대학 졸업자들이 타국(他國), 광산의 갱()속으로 들어가 품을 팔았어야 했던 우리 선배들의 40년도 안되는 과거(過去)를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전쟁으로 부터 나라를 건지고, 찢어진 가난을 벗어나게 하여준 지난 영도자(領導者)들에게 존경(尊敬)과 경의(敬誼)를 표하기는 커녕, ()속에서 시체를 꺼내어 짓밟고, 실각(失却)작업을 펴고 있는 그들은 과연 지난 3 년동안 국가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여 놓았는가?

 

전쟁으로 부터 나라를 지켜주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자본(資本),기술(技術),시장(市場)을 제공하여 주어 왔던 우방(友邦)에게는 "할 말을 하여도 그들은 우리를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라며 자극하는 현 집권자의 오만(傲慢)"어릿광"에 경악(驚愕)을 금할 수 없다. 우방을 버리고 원수(怨獸)와 동침(同寢)하겠다는 말인가?

 

()에 대한 충분한 보상(報償)을 하여 주면 핵을 포기(抛棄)할 것이라는 어리석고 나이브한 발상(發想)은 나라를 송두리째 넘겨 주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는 가 ? 그들에게 한 두번 속아 보았는 가? 깡패집단에게 돈을 줄 터이니 무기(武器)를 내어 놓으라고 하면 무기를 내어 놓겠는가? 언제까지 그들에게 끌려 다닐 것인가? 언제까지 그들의 밑을 닦아 주려하는 가? 그들에겐 공갈과 무기가 모든 밑천인것을......

 

무기는 내어 놓지 않고 보상만 계속 요구하여 올 것이다. 무엇이 그리 아쉬운가 ? 대북정책(對北政策)이야말로 침묵(沈默)이 금()이며 쓸어져 가는 그들앞에서 "조용히 참고 기다리는 정책도 좋은 방책일 것이다. 무엇이 아쉬워 그렇게 안달들인가? 왜 값만 올려 주려하는가?

 

독일어에 이런 말이 있다. Man muss Geduld haben.또는 Man muss geduldig sein. 참고 기다려라! 어떻게 만들어 놓은 나라인데...... 지금 세계경제규모 (GDP) 11위가 된 우리 조국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NavyOfficer862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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