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세상의 이치를 알고 사람들의 고통과 함께 하는겁니다.”
좌파스님 운동권스님 청개구리스님…. 명진(明盡)스님(전 봉은사 주지)의 별명입니다. 지난해 현 조계종 권력과 대립각을 세운 후 승적이 박탈된 후엔 ‘프리랜서 스님’으로 불리더니 얼마전 이명박정권이 사찰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또하나의 별명을 추가했습니다. 바로 ‘막가파’스님입니다. MB가 영포빌딩으로 빼돌린 청와대 문건중에 ‘명진(스님)의 막가파식 행태에 전략적 대응방안 강구’라는 공식문건이 발견됐기 때문이지요.
불의한 정권과 부패한 세력에겐 명진스님은 눈엣가시입니다. 거침없이 일갈(一喝)하는 서슬퍼런 모습은 ‘포청천(包靑天)’처럼 공포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힘없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스님은 한없이 약하고 부드럽습니다.
photo by 미주현대불교
명진스님은 지난 19일 뉴욕 행사를 끝으로 ‘스님 어떤게 잘사는겁니까?’ 미주순회 북콘서트를 마쳤습니다. 당초엔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두곳에서만 행사를 할 예정이었지만 동포사회 요청이 쇄도해 샌디에고, 워싱턴 DC,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 등 다섯 곳에서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고 합니다.
스님을 만난 것은 21일 뉴욕원각사에서였습니다. 맨해튼에서 북쪽으로 차로 한시간반 정도 떨어진 오렌지카운티 소재 뉴욕원각사는 1974년 숭산스님이 창건한 미동부에서 가장 오래된 한국사찰입니다. 1987년 법안스님의 원력(願力)으로 지금의 30만평 부지로 이전, 미국에서 가장 큰 불교 사찰의 기록도 갖게 되었지요.
법안스님의 와병(臥病)으로 2002년 전 통도사 주지 정우스님이 원각사와 인연을 맺었고 전통 대가람으로 만들기 위한 대작불사가 2009년부터 10년째 진행되고 있습니다. 2년전 상량식을 한 대웅전은 수령 900년 내외의 나무를 대들보와 서까래로 쓰고 1천년전 고려시대 전통기법을 재현한 국보급 절집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뉴욕에 왔는데 원각사를 안볼 수 없다시며 찾아온 스님은 주지 지광스님과 대작불사를 일선에서 지휘하는 이광복 도편수의 안내로 경내를 둘러보며 감회가 특별해 보였습니다.
세상은 종종 명진스님을 수행과는 거리가 먼 정치스님으로 오해합니다. 기실 스님은 ‘승려는 법당 부처님앞에 신심이 두터워야 한다’며 스스로를 경계하는 수행자의 모습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열아홉에 출가해 무려 40안거를 났고 강남대찰 봉은사 주지를 할 때는 3년간 산문밖 출입을 삼가며 매일 일천배(一千拜)를 올리는 모습에 불자들의 감동을 자아내기도 했지요.
그런 스님이 세상과 종단에 대해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은 전두환 군사정권치하였던 1986년 전국승려대회 사회를 보면서부터였습니다. 94년 조계종단사태때는 봉암사 선방에 있다가 나와 부처님께 가사장삼을 바치고 이 개혁이 성공하지 않으면 산문(山門)을 떠나겠다고 맹세했고 기어코 서원을 이뤘습니다.
가까이서 뵌 스님은 불자들은 물론, 법랍(法臘)이 한참 아래인 후배 스님에게도 함부로 하대(下待)하지 않는 겸양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말많고 탈많은 조계종단과 적폐정권에 대해선 서릿발같은 직설(直說)과 독설(毒舌)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스님과 하루 일정을 같이 하며 나눈 생생한 대화록을 소개합니다.
“기둥째 썩어가는 집구석 보고만 있나”
“지금 종단은 불교적 마인드가 아니라 이해관계가 얽히며 세속의 집단과 다름없이 되버렸어요. 종단분규가 밖으로 나가면 일선의 비구니 스님도 그렇고 불자들도 떨어져나가요. 얼마전까지 제가 싸움의 중심에 있어서 원망을 많이 받았는데.. 오늘의 불교는 문화재관리국에서 갇혀있어서 적당히 사는 문화재관리수준으로 있습니다. 이런 식이면 불교라고 할 수 없지요. 돈으로 순응되니 승려대회를 해도 앞장서서 막는거에요. 대체 수행을 왜 합니까, 수행의 목적이 뭔가요? ‘이뭣고 이뭣고’ 하는데 이뭣고 안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바세계 와서 나는 누구일까. 왜인가? 라고 고민 안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걸 참구(參究)한다고 깨달은 것처럼 존경받는건 사기에요. 깨달으면 해답을 줘야 하지 않습니까. 일선포교를 하는 분들, 가난한 절, 열심히 기도하는 절엔 미안합니다. 피해가 가니까요. 그러나 기둥째 썩어가는 집구석을 어떻게 그냥 보고만 있습니까. 그래서 고무장갑 끼고 피고름 묻히더라도 내가 해야겠다, 한거죠.”
“위기의 절박함이 없는 조계종단”
“종단은 희망이 없습니다. 대안세력이 없어요. 젊은 스님도, 선방 스님도 그렇고 뭐가 결기를 가져야하는데 위기의 절박함이 없습니다. 승려대회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선방도 참여하고 몇군데 하지만 대중들이 보고 다 압니다. 양심적이고 절집하나만 바라보고 정의감있는 불자들이 삭발하고 그러지만 동력이 생길수 없습니다. 어느 집단이든 10~20%는 부작용이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정도라면 내부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예전에 은처승(隱妻僧) 없었나요? 내가 아는 사람도 있는데.. 하지만 과거엔 그런 사람이 큰 직책을 안맡습니다. 본인도 미안해하면서 돈 조금 버는 절에서 목탁치고 지냅니다. 나도 뭐라고 절대 안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게 너무 광범위해졌습니다. 내가 어렸을때면 도끼라도 들고 나갔을거에요. 이런 문제를 내부에서 해결하려고 쌍계사 종회원으로 들어갔어요. 근데 비공개회의로 만들어 다 내쫒는겁니다. 거기에 호위세력들이 코먹은 소리하면서 어깨 툭 치면서 ‘어이 선배님 고만하셔..’ 그따위 짓 했어요. 제가 전면에 나서면 권력투쟁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전체 판을 보고 필요하면 힘이 될 수도 있지만 지금 제가 나서는건 절대 도움이 안됩니다.”
“빨갱이 스님짓 안하면 절도 지어드릴텐데..”
“2007년 봉은사 주지로 가서 1000일간 하루 천배하면서 기도를 했어요. 그러니까 강남의 보수적 아줌마 신도들이 ‘명진스님 명진스님’ 하고 따르게 된거에요. 이분들이 ‘아이구 정권 비판하지말고, 빨갱이스님 짓 안하면 절도 지어드릴텐데’ (웃음) 아쉬워하면서도 그래도 좋아는 했어요. 투명하게 공개살림 했잖아요. 신도들한테 그것보다 중요한 일 없습니다. 항상 주지를 하는 사판(事判)은 등상불(燈像佛)이지만 법당 부처님앞에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첫째입니다. 열심히 절하고 목탁치고 기도를 해야지요. 수좌(首座)는 좌복(坐服)에 신심 있어야 하고 경전 공부하면 책상머리에 앉아 있어야 합니다. 법문도 잘해야 하지만 부처님앞에 신심이 있어야 신도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어요. 봉은사가 도시공원으로 묶여 있습니다. 도시계획법때문에 불사를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전국에 괜찮다는 소나무를 다 찾아서 심었어요. 나이많은 노보살님들 지금도 나무 보시고 운답니다. ‘아이구 스님이 심은건데’하며. 지금 많이 자라서 전부 명품 소나무가 됐어요. 2011년 봉은사에서 나와서 가기만 하면 1천명씩 따라다녔어요. 그런걸 잘 다독여서 절도 짓고 살림도 해야하는데 (웃음) 내가 그런걸 엄청 싫어해요. 묶이는 것도 싫어하고.”
“간화선의 세계화, 부질없다”
“조계종에서 저를 제적 징계 할 때 몇가지가 있어요. 첫째 종단 비판하고, 종정 폄하하고 거기에 봉은사 땅 사취하려 했다고까지 했는데..봉은사 땅문제는 허위사실로 명예훼손 1천만원 보상금과 정정보도하라고 한달전에 판결났어요. 종정 폄하는 제가 스물여덟살 때 해인사 방장스님한테 ‘스님목을 단칼에 잡아 내던지면 내 죄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했는데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고 하지 않습니까. 무슨 인격 모독한 것도 아니고..프란시스코 교황 오셔서 세월호 단식농성장 갔을 때 ‘국가원수로 온건데 바티칸은 중립을 지키셔야죠’ 하니까 한마디로 ‘고통앞에 중립이 없다’고 했어요. 교황 다녀간 다음 종단이 광화문에서 40억 들어가는 큰 행사 만들었습니다. 동남아시아 스님들 초청해 고급호텔 투숙하고 사람들 모아놓고 ‘이것을 아는가?’ 하고 끝났어요. 그때 네팔 지진 났는데 차라리 성금 보내주는게 낫지, 이런 행사에 40억을 쓰다니, 화장실에 단청한다고 냄새가 없어집니까. 불교만이 위대한 진리라고 착각하면 서울역 앞에 ‘예수천국 불신지옥’ 떠드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이 옳다라고 확신하는 순간 아무것도 없는거에요. 부처님께서 모든 것은 다 변한다고 하신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과연 한국불교가 세상사람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까.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간화선의 세계화’에요. 간화선이 뭡니까? ‘다 깨친다?’ 뭘 깨칩니까? 모든 욕심을 내려야 하는데 깨닫겠다, 도인이 되겠다는건 깨달음에 대한 욕심입니다. 그런 욕심으로 백날 정진해봐야 소용 없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올바른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스님은 단언컨대 한국사회에 없습니다. 세상의 고통받고 억압받고 핍박받는 사람과 연대하지 않으면서 무슨 메시지를 던집니까. 깨달음은 내가 세상의 이치를 알고 그 지혜로움을 통해서 사람들의 고통과 함께 하는 것이 목적인데 법상에 앉아 주장자(拄杖子) 들었다 놨다 하면서 지도 모르고 내도 모르는 소리 하는건 밥만 축내고 있는 겁니다.”
“지혜롭지 못한 자비와 사랑은 사람을 망친다”
“산삼 인삼 녹용이 좋은 보약이지만 삼은 열병환자가 먹으면 죽습니다. 금이 아무리 좋다하도 금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는 말 있지요. 개가 어지간해서 배탈이 나는 법이 없습니다. 근데 배탈이 나서 배설을 한게 오래되어 딱딱하게 굳으면 가루를 내서 잇몸이 썩을 때 몇 번 바르면 바로 낫습니다. 그래서 더러운 개똥도 약으로 쓸 수 있어서 나온 말입니다. 하찮은 개똥도 약이 될 수 있지만 아무리 좋은 산삼과 녹용도 열병환자에겐 안맞기 때문에 처방을 할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지혜롭지 못한 자비와 사랑은 사람을 망칩니다. 스님들은 중생들의 병과 고통을 치료하는 의사인데 아무한테나 산삼주고 녹용주면 안되기 때문에 처방할 수 있는 지혜를 갖기 위해서 우리는 정진을 합니다. 잘못된건 무조건 욕을 하고 절단을 내서라도 고쳐야 합니다. 그러니 좀 힘들더라도 참고 계세요. (웃음)”
“단지동맹이 아니라 단지불회”
“젊었을 때부터 제일 좋아했던 언구가 보조 지눌스님의 ‘단지불회 시즉견성(但知不會 是卽見性)’이에요. ‘다만 알지 못할 줄 아는가. 이것이 바로 성품을 본(見性) 것이니라’ 스물일곱살에 그 경구를 접하고 제가 확 뒤집어졌습니다. ‘그렇지. 인간은 다 아는 것, 알아지는 것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데 인간이 가진 좁은 소견 덩어리가 아무리 알아서 세워진다한들 업이 늘어나는 것이지 실지 그것이 문제해결이 안된다. 알고 있는걸 자꾸 버려야 하는데.. 그럼 몰라야 하는게 아니냐. 모름이 가득한 그 자리를 나는 성품의 본자리라고 본다..’ 이렇게 생각하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게 소크라테스가 ‘난 아는게 아무것도 없다 딱 하나 아는게 있다면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한 말과 똑같은겁니다. 역대 조사도 그런 것을 근거로 공부했어요.
제가 사람들한테 그럽니다. 무슨 회, 무슨 회 해도 단지불회가 제일 낫다, 아나고회, 광어회 그런거보다는..(웃음). 단지불회를 다른 사람들이 (안중근의사 단지동맹처럼) 손가락을 잘라서 만든 모임인줄 아는데 그건 아니고 굉장히 철학적 모임입니다.(웃음) 그렇게 해서 끌고 오는데 그것도 권력인지.. 잠실에 법당도 만들고 종무원들 살림 맡기고 신도들한테 맡겼는데 그걸갖고 싸우는 거에요. 서로 비난하고 묘하게 갈등이 생기는데, 그래 내가 매일 그런 거 하지말자고 했는데 이런꼴이 뭐냐 하고 해산시켰습니다. 없애버렸어요. 법회도 안했는데 그중 몇 분이 와서 법회만이라도 해주십시오, 하길래 ‘그래 좋다, 열명이 모이든 삼십명 모이든 그건 한다..스님이 되서 공밥 먹고 살았는데 많은분들한테 부처님 가르침 전달해주라고 여러분이 주는 밥 먹고 살았는데 그건 내가 해줄 의무가 있다..’ 그래서 법회만 하고 있어요. 처음엔 떠돌아다니며 하다가 장충동쪽에 재가연대 공간이 있는데 거길 카페식으로 운영합니다. 100여명 들어가는 곳인데 지금은 한달에 한번씩 자원봉사자 몇 명이 책상좀 치우고 법회를 하고 있어요. 원악산에 아는 스님이 비워놓은 토굴이 하나 있습니다. 초파일 이후에 한번도 안갔는데 거기가 터가 좋습니다. 가을부터는 거기 내려가 있을까 합니다.”
“평화의 길 법인 세워 민족화해운동 할것”
“쌍용차사태, 용산참사, 세월호, 그뿐만 아니고 권력에 의해,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고 고통받은 힘없는 사람들 위한 일에 연대하고 불교도 알리고 민족화해운동도 하고 그런 일을 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길’이라는 법인을 만들려고 해요. 제가 남북 해외동포 같이 만드는 잡지 ‘민족21’의 잡지사 발행인을 6년 했어요. 북측 인연도 있고 해서 평화의 길 첫 번째 사업으로 백담사에서 건봉사로 넘어가는 만해스님의 옛 길을 복원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건봉사는 우리나라 최북단에 있는 절인데 백담사에서 건봉사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옛길이에요. 북측과 함께 내설악 평화의 길을 잇자는 것이죠. 두 번째 사업은 봉은사 있을 때 북측과 협약 맺은게 있습니다. 북녘의 68개 사찰 비문을 탁본(拓本)하여 기록으로 남기는거에요. 그때 민족21 잡지 기자들이 방북해서 10권짜리 도록을 만들었는데 책 만드는 싯점에 내가 쫒겨났어요. 북측과 탁본사업도 하고 여러 가지 남북관계를 끌어나가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