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秋夕)이었다.
과거형으로 이야기 해야 할 안타까운 일들이 수도권을 할퀴고 간 추석이었다.
차례도 못 지내고 수해 복구(水害復舊)에 정신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추석 명절 내내 출근을 해야 했던 공무원 친척의 슬픈(?) 연휴 이야기 등 이번 추석은 예년과 조금 달랐다.
연휴 마지막 날, 언제 그랬냐는듯 시야가 탁 트인 높은 하늘과 듬성듬성 떠 있는 구름들은 얄미울 정도로 맑은 날씨를 뽐내며 자외선을 쏟아 내고 있다.
가족들과 차를 달려 자유로 중간에 있는 파주 통일전망대(統一展望臺)를 찾았다. 실향민(失鄕民) 2세라 그런지 명절 때면 임진각이나 문산 쪽으로 신경이 쓰인다.
예전부터 임진각을 가는 길에 있는 전망대를 들러 보리라 생각은 하였지만 날씨가 좋지 못해서 차일 피일 시야가 좋은 날을 기대했던 것이었는데 마침 기회가 맞아 떨어졌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셔틀을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에도 불구하고 100여미터 정도의 긴 줄이 있었고 셔틀버스가 10여분 간격으로 계속 방문자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5분 정도 탑승을 하니 산꼭대기 전망대 주차장 까지 올랐고 매표(買票)를 한 뒤에 전망대로 들어갈 수 있었다.
2층 전망대와 옥상 전망대 까지 올랐다. 층마다 망원경을 설치해 지척의 북쪽 땅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는데 시야(視野)가 좋아서 그런지 멀리 까지 그 모습이 선명하여 논둑길을 걷고 있는 그곳 사람들의 모습도 포착(捕捉)이 가능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듯 하다고 하던가? 그 말 그대로 북녘 땅은 가까이 있었다.
폭우로 강물이 흙탕이 되었고 수심이 조금 깊어졌을망정 학창시절 견학(見學)으로 찾았던 기억 없는 경험과 달리 지금 목도(目睹)하고 있는 북한의 모습은 너무 가까워 위협적일만큼 거리가 멀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뒤로 돌아 본 곳에는 신도시(新都市)가 들어서 있지 않은가.
마음만 먹는다면 10분 안쪽으로 차를 타고 넘어갈 거리이기도 하거니와 마음만 먹는다면 커다란 대포(大砲) 알이 아니더라도 불발탄(不發彈) 하나 정도는 넘나들 거리이다.
단지 이곳이 군사지역임을 인식 시키는 것은 군용 트럭에 가득 탑승한 현역병(現役兵)들의 모습이 간간히 보인다는 것이다.
이토록 조용하고 자유로운 자리가 첨예(尖銳)한 군사 분계선(軍事分界線)이라는 것은 자연의 이치로는 설명이 힘들다.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전망대를 찾았다. 각자의 사연이 있겠지만 휠체어를 타고, 목발을 짚고 이곳에 오른 백발(白髮)이 성성한 할아버지들은 가족들과 두고 온 고향을 뒤로 하고 연신 셔터를 눌러 대고 있었다.
그런데 좀 특이한 대화를 하는 젊은 사람들이 있었다. 일부러 들으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성의 친척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처음엔 흠칫 놀랐으나 그들이 탈북인(脫北人)란 것을 이북 사투리로 단박에 알아 챌 수 있었다.
그들의 고향은 강 건너 가까운 곳의 이북 땅.
나이드신 우리나라 실향민뿐 아니라 명절이면 이곳을 찾아 고향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서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eke는 순간이었다.
나의 고향(故鄕)은 서울이다.
태어난 자리도 지하철을 타면 금방 갈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살면서 다시 찾았던 기억은 길을 잘못 들어서 우연히 지나쳤던 단 한 번의 경험 밖에는 없다.
하지만 고향을 그리며 살지 않는다. 왜?
언제나 갈 수 있는 곳이니까. 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자유롭게 왕래(往來)가 가능한 곳이니까.
하지만 실향민이나 탈북자의 심정을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된다.
나이든 분들은 살아 생전에 찾아 볼 수 없는 곳이니, 더욱 더 애틋하리라.
돌아오는 길에 전망대 주변의 두부촌 마을에 들러 점심(點心)을 하려 하였으나 인산인해(人山人海)로 뒤섞인 자동차와 음식점 앞에서 늘어선 긴 줄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하여 차를 돌렸다.
산 정상에서 보았던 평화로운 모습의 극치(極致)는 산 아래에 펼쳐지고 있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분단의 현실이고 참으로 아이러니한 추석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