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주 공립고교 최초의 아시안교장 이기동(53) 씨가 뉴욕마라톤에서 펀드레이징 레이스를 펼쳐 잔잔한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이기동 교장은 지난 1일 열린 2015 뉴욕시티마라톤에서 생애 첫 완주에 성공했습니다. 5만여명이 참가한 뉴욕마라톤은 보스턴, 런던마라톤과 함께 세계 3대 마라톤의 하나인 뉴욕마라톤은 마라톤 애호가들에게 한번쯤 경험하고 싶은 대회로 꼽힙니다.
이기동 교장도 평생 꼭 이루고 싶은 꿈중 하나가 뉴욕마라톤을 완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뉴욕마라톤 출전 자격을 갖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무려 5만여명이 참가하지만 출전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지요.
일반인이 뉴욕마라톤에 출전 기회를 잡으려면 뉴욕러너스클럽(NYRR) 회원으로 NYRR이 주최하는 대회를 9차례 참가하고 한차례 봉사를 하거나 연령별 기준기록 통과, 기부금 출전, 혹은 복권추첨을 통해 선정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기동 교장은 그동안 3차례 복권 추첨을 신청한 끝에 지난 2월 당첨의 기쁨을 안았습니다.
이민 1.5세인 그는 2005년 뉴욕주 공립고 최초의 아시안 교장으로 부임(赴任), 뛰어난 리더십으로 이듬해 답스페리고를 뉴스위크 선정 전국 랭킹 49위로 끌어올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주인공입니다.
모국에서 교육행정과 노하우를 전수하고 싶은 소망에서 2011년 제주 서귀포에 개교한 영국계 노스 런던 스쿨의 전체 교감 겸 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그는 4년간 열과 성을 쏟은 후 지난해 11월 월터 파나스 하이스쿨 교장으로 뉴욕에 돌아왔습니다.
웨스트체스터 코틀랜드에 있는 월터 파나스 하이스쿨은 학생수가 2천명에 달하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명문교로 이기동교장이 답스페리 하이스쿨에 부임하기전까지 교감으로 봉직(奉職)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기동 교장은 재임 당시 교직원들과 아주 친밀하게 지내고 학교발전을 위해 애정을 많이 기울인 곳이라 미국에서 마지막 소임을 보내기 위해 돌아왔다고 밝혔습니다.
생애 첫 공식 마라톤대회에 나가게 된 그는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이같은 사실을 알리고 3천달러의 학교발전기금을 마련하겠다는 목표로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이교장이 마라톤 완주에 성공하며 크라우드 펀딩으로 기금을 조성하는 것이었지요.
이기동 교장은 "생애 첫 마라톤대회를 개인적인 추억으로만 남기는 것보다 교사와 학생들이 학교에 대해 관심을 갖는 뜻깊은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목표를 향해 포기하지 않도록 다그치는 의미도 있었다"고 웃었습니다.
골프외엔 특별한 운동을 하지 않았던 그에게 26.2마일(42.195km) 마라톤 도전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평생 5마일(8km) 이상 뛰어본 적이 없었다는 그는 틈나는대로 몸을 만들어갔습니다.
교장으로서 바쁜 스켄줄에 쫒겨 연습도 충분치 못했지만 자신을 지켜보는 학생과 교사들을 생각하며 훈련을 해나갔습니다. 대회 한달반을 남기고 18마일을 쉬지 않고 달리며 자신감도 얻게 됐구요. 대회일 새벽 4시20분에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7시경 맨해튼 42가에서 주최측이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출발장소인 베라자노 브리지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였습니다.
오전 9시30분이 엘리트선수들이 먼저 출전하고 이교장 등 일반참가자들은 11시를 넘기고서야 출발선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뉴욕시 5개보로를 모두 통과하는 레이스는 이날 밤까지 계속됐습니다.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이교장도 마침내 피니시라인을 통과하며 영광의 완주(完走)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픈 다리를 이끌고 간신히 출근한 그는 문을 열려다 깜짝 놀랐습니다. 교장실 앞에 또다른 결승 테이프가 걸려 있었기때문입니다. 'Finish Line(결승선)'이라고 쓰인 종이가 테이프로 붙여 있고 그 아래는 'Comgrtats you did it 26.2 Miles(축하합니다. 26.2마일을 당신은 해냈어요!)'
역대 교장 중 최초로 뉴욕마라톤을 완주한 이교장을 위한 교사와 학생들의 축하 세리머니였습니다. 이교장은 1987년 뉴욕 카도조고교 교사시절 스승의날을 처음 연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부임하는 곳마다 한국인 특유의 정(情)으로 교사와 학생들을 하나가 되게 했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 경험을 살려 한인학생들을 모아 코리안클럽을 만들고 한인학부모협회도 결성하는데 힘을 보탰는가 하면 뉴욕시 한인고등학생 연합회를 조직해 축제도 거행하고 한글 뉴스레터도 만드는 일도 했습니다.
이 교장은 "나 자신 1.5세로 미국에서 자라는 한인 학생들의 심경을 너무도 잘 이해했어요. 아이들이 당당하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도록 네트워크를 만들어주고 사제 간의 정과 예절을 느낄 수 있는 한국의 좋은 관습을 미국 학교에 도입하고 싶었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4년전 미국 고교의 교장직을 그만두고 모국에 돌아간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반대했습니다. 정년도 보장됐고 4년만 더 근무하면 은퇴후에도 동일한 연봉의 연금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스스로 차버리냐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모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게 평생 소망이었던 그는 "이번에 놓치면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어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제주에서의 생활 또한 많은 보람을 안겨주었습니다.
영국식 교육을 받는 한국 학생들의 중간에서 1.5세요 미국교장 출신인 그는 없어선 안될 존재였기때문입니다. 영국학교에선 학부모들의 역할이 전혀 없지만 그의 제안으로 미국식 PTA(학부모교사협의회)가 만들어져 학교 행정과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나치게 권위적인 영국의 학교에서 학생들의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세심한 신경을 썼고 교사와 학생간 문화적 간극(間隙)을 줄이고 서로 이해하는 가교 역할도 이교장의 몫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교장이 4년간의 제주생활을 마치고 뉴욕의 학교로 돌아간다는 소식에 그 학교로 전학을 가겠다는 해프닝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이기동교장은 이제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요.
"저의 마지막 꿈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치는거에요. 더 이상 교장이 아니라 평교사로 어느 작은 섬의 분교에서라도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꿈을 늘 꾸고 있어요. 먼 훗날 묘비명에 ‘Teacher Proud Keith Yi’라는 말이 남겨지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