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곤 중심부(中心部)에는 한눈에도
규모가 웅장한 미얀마식 탑신(塔身) 4개의 위용(威容)을 갖춘 건물이 보입니다. 바로 양곤 중앙역(中央驛)입니다. 식민지 시절 건축한 영국식(英國式) 건물(建物)의 역은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독립 이후 새로 건축을 하여 1954년에 완공을 했습니다.

미얀마는 ‘시간이
멈추어 버린 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앙역에서 그 말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시는 기적(汽笛) 소리가
울릴 것 같지 않은, 휑하니 너무나도 쓸쓸한 모습으로, 지나간
영욕(榮辱)의 세월을 간직한 자태(姿態)로 다가왔습니다. 이곳에서 ‘철마(鐵馬)는 달리고
싶다’는 철원 월정리역의 녹슨 기차가 떠오른 것은 암울한 분단(分斷)의 현실에
대한 한갓된 감상(感想)만은 아니었습니다.
미얀마에는 전국으로 총 연장 5,000km의 철로(鐵路)가 있습니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世界大戰) 당시 일본과의
전쟁으로 파괴되었거나 노후화 된 노선을 제대로 복구를 하지 못해 전국노선(全國路線) 운행이
어렵다고 합니다.

양곤 중앙역은 양곤 도시외곽(都市外廓)을 도는 3시간 소요의 순환선(循環線)으로 명맥(命脈)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대중교통(大衆交通)이 좋지
않은 양곤의 서민(庶民)들에게 순환선은 참 소중한 교통수단(交通手段)입니다.
순환선 노선도
중앙역 주차장에서 전설의 포니를 만났습니다.
우리나라 제품 광고판
양곤 시내에는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운 대저택(大邸宅)들이 연이어 있습니다. 프놈펜도 그렇지만 크기와 밀집도(密集度)는 양곤이 한 수 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가까이
보려고 해도 곳곳에 무장군인(武裝軍人)들이 지키고 있고 택시기사가
너무 긴장하는 듯하여, 천천히 가자고 해도 못들은 체 하였지만, 바로
지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저택들이 사라지면 넓은 길이 보이고 고급 골프장
입구가 있는 곳에서 회전을 하고 다리 하나를 건너면 갑자기 포장도로(鋪裝道路)의 상태가
좋지 않은 듯, 잠시 덜컹거리는데, 그나마 끊겼는지 흙먼지가
날리기 시작합니다. 한 순간에 다른 세상(世上)이 열립니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이런 곳이 있을까요? 넓고 한산한 그러나 잘 정돈된 양곤
중심가의 부촌(富村)을 지나면 도로가 좁아 지면서
버스와 자동차, 인력거와 자전거 그리고 사람들이 뒤섞인 어수선한 도로와 장터 비슷한 곳이 나오고 지나자마자
양곤 인구의 70%가 넘는 사람들이 사는 빈민촌(貧民村)이 나타납니다. 양곤에는 중간이 없는 듯합니다. 부촌과 빈민촌만이 있을 뿐입니다. 1% 아니, 0.1%와 99.9%의
대비(對比)는 극명(克明)하게 다가옵니다.
오토바이 운행이 금지된 양곤에서 버스는 중요한 교통수단입니다.
양곤에는 오토바이가 없습니다. 동남아(東南亞) 대부분의 국가(國家)에는 넘쳐나는
오토바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궁금해서 택시기사에게 물었더니, 양곤시내에는
오토바이 운행이 금지되어 있다고 합니다. 교통혼잡(交通混雜)과 소음(騷音)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실은 민주화(民主化) 시위(示威) 확산(擴散)을 막고 분리주의자(分離主義者)들의 폭탄테러를 원천봉쇄(源泉封鎖)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얘기를 하여주었습니다. 한
순간에 금지를 시키는 군사정부가 대단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발전(發展)을 철벽(鐵壁)으로 막는 것은 바로 군사정부임이 분명합니다.
예전에 베트남을 갔을 때, 동남아라고는 캄보디아가 처음이기도 했지만, 낡은 버스에 5시간이 넘게 시달리며 도착한 호치민을 보고 규모에 놀라고 프놈펜보다 발전된 모습에 다시 놀라서 그만 ‘좋다’라는 소리가 얼떨결에 나왔습니다만, 동일한 곳을 어디를 먼저 보았는지에 따라 느끼는 차이가 매우 크며, 받아들이는
정도는 역설적(逆說的)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진
줄 알았지만, 양곤 시내 중심가를 보고 양곤 외곽의 약속된 공장으로 가면서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이 프놈펜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이 틀렸다는,
아니, 더 비참(悲慘)하다는 사실을
인지(認知)하는데, 5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군부독재(軍部獨裁) 50년
동안 미얀마의 빈부격차(貧富隔差)는 상상(想像)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고 합니다.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은 자본주의(資本主義)
현상일 수 있지만, 미얀마는 그
정도가 심하다고 합니다.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은 설 자리를 거의 잃었다고 합니다. 8%가 넘는 성장률(成長率)은 그보다
훨씬 높은 인플레이션의 그늘에 완전히 가려져 있으며. 근로자(勤勞者)들의 월급보다
수십 배가 넘는 월세를 감당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양곤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합니다.


빈민촌(貧民村)의 사람들이
처음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대부분 양곤에 살고 있다가 화재(火災)나 자연재해(自然災害)가 발생을
하면 재개발(再開發)을 한다며, 정부가 집을 새로 지은 후에 감당할 수 없는 집세를 책정하였고, 결국
이 빈민촌으로 쫓겨나올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빈민촌의 집들은 허가 받지 않은 판자집들이기 때문에 또 다시 무슨 이유로, 언제 쫓겨날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미얀마가 빈부격차가 심해진 것은 독재과정(獨裁過程)에서 벌어진 부패(腐敗) 탓이라고
합니다. 사업허가권(事業許可權)을 군부가
독점해 분배하고 뇌물을 받는 구조에 의해 경제동력(經濟動力)은 상실(喪失)되고 시민들의 삶은 나락(奈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미얀마의 젊은이들이 꿈을 잃어가고 있으며, 여성들은 봉제나 청소라도 할 수 있지만 남성들에게는 이마저도 없다고 합니다.
양곤에는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젊은 남성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업무상 방문한 봉제공장(縫製工場)
근로자의 대부분은 여성입니다. 그래도
이 공장에는 남성도 몇 명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산을 지켜보고 있는데 여성봉제공(女性縫製工)
한 명이 유창한 영어를 하기에 말을
건넸더니,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취직을 할 수 없어 봉제공장에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나마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합니다. 양곤에 있는 회사에서 통역 일을 하는 것과 미화 100달러 월급이 꿈이라고 수줍게 얘기하던 그 여성이 눈에 선하기만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빈민촌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고급빌라를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곳도 아마 빈민들의 거처(居處)가 있었을
텐데, 머지않아 그나마 고단한 하루를 쉴 수 있는 빈민촌도, 개발에
밀려 없어지고 더 먼 외곽으로 가게 되겠지요.
불교(佛敎) 윤회사상(輪廻思想)의 영향으로 빈부(貧富)는 지난 삶의 업보(業報)라고 여기고 힘든 삶을 묵묵히 살아간다는 미얀마 사람들, 그들에게 부처님 설법(說法)이 인내(忍耐)를 넘어 희망(希望)으로 비추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업무상(業務上) 또는 관광(觀光)으로 캄보디아를 방문하는 분들은 캄보디아에 직항편(直航便)이 없던
시절에는 대부분 베트남 호치민을 거쳐서 프놈펜을 왔었고 지금도 그렇게 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방문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공항 또는 터미널에 나가면 반가운 얼굴이지만 무엇을 감춘듯한 묘한 표정이 슬쩍 보이는 순간, 두
손을 꼭 쥐면서 “어떻게 사세요? 이런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세요.”라는 공치사(功致辭)를 흘러내리는
땀방울만큼 쏟아내며 하는 끓는 말씀들을 몇 년을 듣다 보니, 70년대 중동(中東)의 건설현장(建設現場)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분투(奮鬪)를 소개하던 대한뉴스에서는 그들이
바로 애국열사(愛國烈士)라고 했는데, 우리 또한 그렇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어 괜한 각진 자부심에 한껏 가슴을 내밀고 우쭐대던 때도 있었기는 합니다만, 방문객들은 호텔로 향하는 차 안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는 몰라도 경계심을 풀고 말씀을 이어가는데, 호치민 공항에 내려서 이런 곳이 있네, 어떻게 살까 싶다 했는데, 프놈펜에 오니 호치민보다 더한 곳이 있다는 것에 질려서, 그만 첫인상도
갖기 전에 말문이 막혔다고 합니다.
인도지나반도(印度支那半島)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이곳을 스치듯 지나갔던 사람들이 보고 느낀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과연 우리는 이들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모르는 것이
많으면서, 이들을 우리의 잣대로 살피면서, 게으름을 탓하고, 비루(鄙陋)함을 꺼리고, 값싼 동정(同情)에 달러
몇 푼을 흔들어 대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부끄러움은 커져만 가게 됩니다.

이들의 역사(歷史)는 깊고, 문명(文明)은 찬란(燦爛)하였습니다. 비록 근대에 들어 위대한 왕조(王朝)는 제국주의(帝國主義)의 흉포한
총칼에 무너져버려, 그 넓은 반도는 몇 나라의 식민지(植民地)가 되어
엄청난 수탈(收奪)을 당했고 지금도 독재정권에 시달리며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인도지나 사람들은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으며, 그들의 정신(精神)은 빼앗기지도 않았고, 빼앗을 수도 없었습니다.
3편에서 불자(佛者)들의 성지(聖地) 쉐다곤 파고다를 소개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