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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희, ‘불멸의 남자 현승효’
1974년 경북대 의대 본과2년, 박정희유신독재 철폐운동 주도하다 제명후 강제징집돼 제대 4개월을 남기고 폭염에 완전군장 구보훈련중 사망한 현승효. 그에겐 뼈가 녹고 피가 말라도 식지않는 불멸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28개월간 수첩에 빽빽이 적어놓은 그립고 애달픈 연인의 사연들, 30년만에 빛을 본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를 뉴스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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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승효사상-인간의 회향학적 원리(21)

글쓴이 : 현승효 날짜 : 2023-10-02 (월) 22:03:34


 

자투는 그 원래적 속성으로 인해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소극적 자유의 방어능력, 즉 인간 실체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능력이라는 의미이다. 사실 우리는 미생물과 곤충에게서도 더듬이나 촉수 등을 통해 비아에 대응하는 그들 고유의 방법을 본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둘째는 적극적 자유를 지향하는 능력이다.

 

인간이 인식이라는 무기를 사용하고 난 후에 우리를 엄습하는 것은 이차적 공포다. 이차적 공포는 어마어마한 우주적 공포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주의 이단자인 인간이 자기의 존재를 의식할 때 무언가 이상하고 아직 형용할 수도 인식할 수도 없는 그런 느낌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동굴을 마주하고 섰을 때 우리는 그저 어마어마한 공포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런 기분에 직면한다. 이때 자존의식은 필연적으로 무기를 든다. 그것은 이미 투쟁의 서막을 알리는 행위이다. 그 무기는 메두사의 머리털처럼 역시 두려운 무기임에는 틀림없다. 이 무기 앞에서 저 검은 공포는 무릎을 꿇는다. 가공할 무기를 든 존엄한 의식은 이제 인간이 된다.

 

찬란한 무기로 무장하고 이미 투쟁을 결의한 이 존재는 결전장으로 향하기 위해 산을 내려온다. 그의 손에는 아직 신들조차도 보지 못했던 태양같이 빛나며 메두사의 머리털같이 두려운 무기가 들려있다. 그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공포가 그로 하여금 움켜 쥐게 한 그런, 똑같이 무서운 무기다. ‘이에는 이’, 이것은 인류가 최초로 택한 행위였다. 이 행위, 인식이라는 무기를 들게 한 그 행위가 자투다. 저 투쟁의 모습, 투쟁을 결단한 인류 최초의 의도,

그것이 자투다. 그 자투를 감행하게 한 제일의 공포, 저 파악할 수 없는 존재는 이제 이 빛나는 무기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끝없이 깊은 동굴은 그 빛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다. 자투를 가능하게 한 것은 가능성과 포괄성으로 나타나는 자존의식, 자유의 실체, 자유의지다.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존하며 독존하는 저 자유의지인 것이다.

 

이차적 공포가 인식에 대한 신뢰의 상실에서 온다면 우리는 제일의 공포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공포의 실체가 인식의 상실에 기인하고 따라서 인식이 아직 성립되지 않을 때의 우주의 존재야말로 거대한 공포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식이라는 광명 앞에 우주의 공포는 이제 옷을 벗고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시공이라는 인간의 순수직관 앞에서 구분되고 개체화된 진실로서 나타난다.

 

이제 과거의 우주는 붕괴한다. 이 인간 앞에 마주 선 우주에 의미가 주어진다. 그것은 이미 예전의 우주가 아니다. 우주의 가능성이라는 생명의 빛이 이제 인간의 진실로서 드러난다. 인식이라는 틀에 의해 자연은 조형되고 개체화와 명료성, 조화와 절도를 지니게 된다. 인간은 인식에 의해 자유의 세계를 자연의 세계와 병립시키고 자연의 세계를 지배한다고 확신한다.

 

시인 김춘수는 노래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인간의 마술 같은 손길에 의해 이제 자연은 생명의 꽃을 피운다. 그리고 노래하며 춤추고 비탄한다. 자유의 입김에 의해 우주는 인간과 결합된 우주가 된다. 우주는 인간 진실의 모습을 담은 현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주위의 꽃들이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산은 연인의 가슴처럼 우리에게 안겨온다. 벌레도 풀잎도 우리와 대화를 시작한다. 우리의 가슴엔 환희와 희열이 넘실댄다. 이 환희에 고조되어 노래하고 벅찬 충동에 고무되어 불꽃처럼 타버린 수많은 천재들, 언어의 마술사들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자투의 결과로 세계를 인식하게 되고, 인식은 필연적으로 그 매체로 언어를 도입한다. 우리는 여기서 언어의 가장 심원한 속성이 역동성임을 인지한다. 왜냐하면 우주가 부여하는 저 어마 어마한 공포의 이질감불일치감이 우리의 실체적 자존의식에 대응함으로써 하나의 역동적 현상인 자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자투가 이미 투쟁적 역동성을 띠므로 언어의 심원한 속성에 역동성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 논리학이 언어에 의한 사유의 전개인 한 필연적으로 역동적 측면에서 고찰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위대한 변증법적 논리학자들이 역동적 과정에서 그들의 사고를 전개한 비밀이다. 인식의 환희가 언어로 표출될 때 우리는 언어의 천재들, 시의 마술사들에게서 환희의 실례(實例)를 무수히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환상처럼 감미롭고 행복한 꿈은 다음 순간 역전한다. 그것은 맑은 유리알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꿈에서 깨어 난 인간, 자존의식과 자투와 인식의 실체를 다시 음미한 깨어난 인간의 눈엔 꽃은 그냥 거기에 있고 산은 이미 포근한 연인의 가슴은 아니며 벌레도 풀잎도 그냥 그들의 얘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엄정한 모습으로 절도와 균제를 지닌 채 나의 실체, 자존의식 앞에 우뚝 서 있다.

 

이것은 불일치, 깊은 골이 생기고 넓은 물이 갈라놓은 타자의 존립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 불일치, 이것은 이제 불안을 낳는다. 우리의 밀월 시기는 너무나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 그 깊은 골과 넓은 물은 이제 우리 앞에 거부의 몸짓으로 버티고 있다. 그래서 소월은 노래한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여기서 저만치'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저 몽상적 나르시시스트들을 매료한 환희와 희열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들의 꿈이 가상의 무지개였듯이 우리를 미치게 한 환희도 결국 차가운 인식이 가져온 모상이라면 도대체 이 환희의 실상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때 자존의식과 자투와 인식의 세 요소의 상관관계와 실체를 파악한 사람만이 적확한 해결의 열쇠를 가질 수 있다. 인식의 환희와 희열이란 것은 자존의식의 실체인 자유의 모습이 주는 나르시시즘이다.

 

우리가 이 황홀한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동안은 비련의 희랍 소년처럼 우물에 잠긴 아름다운 자기의 모습만 들여다보다 쇠약해 죽어버리는 운명을 모면할 수 없다. 그 소년이 동경하던 사랑을 끝내 얻을 수 없었듯이 우리는 우리의 통일장의 영역을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저 우물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의 얼굴임을 안다. 그것은 새로운 희열과 환희를 준다. 이 새로운 희열과 환희 자존의식과 자투를 파악했을 때 그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알 수 없는 실존이 주던 저 우주적 공포가 이제 타존재와의 불일치로 분명히 나타남으로써 우리가 얻는 희열,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한발 통일장의 영역에 가까워졌다는 확신이 가져다주는 희열, 우리의 투쟁을 통해 가까워진 목표, 통일장의 영역, 완전한 자유에 대한 확신이 주는 희열인 것이다. 이제 희열과 환희는 자기도취의 마취적 환희가 아니라 투쟁의 확신에 찬 희열인 것이 다. 여기에 우리 철학의 강점이 있다. 무유(無有)의 유(), 무실 (無實)의 실(), 허와 실의 교차 속에서, 우리는 안개 속에 묻혀버린 회향의 길을 찾는 것이다.

 

인식은 실존에 관한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있는 것을 포착하려는 자유의지의 소산이다. 세계의 광대무변함에 경악한 종래의 사색가들이나 종교인들은 우주의 광대함에 겁을 먹고 인간을 우주 속에 던져진 존재로 본다. 그러나 우리가 회향 에 대해 자각한 지금 우주는 우리에 의해 포착된 것이다. 그리고 실재적 존재로서 나타나게 되었을 때 인간은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자투의 존재다. 즉 우리들 자신, 자유의 실체야말로 우주의 심장부인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에서 우리는 자투와 피투의 모순을 자투 속에서 해소하고 자투를 전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즉 실재하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주어져 있는 인간 실체가 자투를 행함으로써 인식이 형성되고, 이는 실재로 전환된다. 가능성이 자투에 의해 존재하는 것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자투를 통해 비로소 실재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은 통일될 수 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nbnh&wr_i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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